팔순 노인 전세금까지 빨아먹은 ‘악마의 통장’[히어로콘텐츠/히든①-上]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6월 22일 04시 30분


히든: 검은돈의 혈관, 대포통장
〈1〉 범죄수익 실어나르는 ‘지하통로’
가짜 사이트 안내 계좌에 송금
폐업업체 대포통장으로 옮긴 뒤
몇 분만에 현금 인출돼 사라져
국세청-은행, 사전 경고도 없어
지난달 4일 인천 연수구의 한 빌딩에서 유종수(가명·80) 씨가 텅 빈 사무실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2023년 10월 그가 전세보증금 4500만 원을 뜯긴 사기 사건에서 돈세탁용 통장을 대준 유령 회사 ‘대한퍼스트’가 있던 곳이다. 유 씨는 붙잡힌 대포통장 조직을 상대로 소송을 내 이기고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 대한퍼스트가 만든 대포통장에 돈을 잃은 피해자는 최소 189명에 이른다.
지난달 4일 인천 연수구의 한 빌딩에서 유종수(가명·80) 씨가 텅 빈 사무실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2023년 10월 그가 전세보증금 4500만 원을 뜯긴 사기 사건에서 돈세탁용 통장을 대준 유령 회사 ‘대한퍼스트’가 있던 곳이다. 유 씨는 붙잡힌 대포통장 조직을 상대로 소송을 내 이기고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 대한퍼스트가 만든 대포통장에 돈을 잃은 피해자는 최소 189명에 이른다.
인천 연수구 송도의 한 대형 오피스빌딩 1810호 앞. 굳게 닫힌 검은 철문에는 태국 출장 마사지 명함이 조잡하게 꽂혀 있었다. 지난달 4일, 왼눈에 하얀 안대를 찬 유종수(가명·80) 씨가 떨리는 손으로 문을 밀어 열었다.

“휑하잖어. 아무것도 없잖여, 아무것도….”

먼지 냄새가 훅 끼쳐오는 18m²(약 5평) 남짓한 공간을 마주한 유 씨가 허탈한 듯 읊조렸다. 텅 빈 사무실 한가운데는 플라스틱 책상 두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의 손에는 2023년 10월 18일 4500만 원을 이체한 기록이 선명한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다. 아내의 투병 때문에 월세방으로 이사한 뒤 남겨둔 피 같은 전세보증금이었다.

유 씨는 가짜 투자 사이트에 속아 돈을 넣었다. 높은 수익을 보장한다는 광고를 믿고 안내받은 통장으로 4500만 원을 보냈다. 그 돈은 곧바로 ‘대한퍼스트’라는 회사의 통장으로 옮겨졌고, 몇 분 만에 현금으로 인출돼 사라졌다. 통장 주인과 실제 사용하는 사람이 다른 범죄용 통장, 대포통장이었다.

정부에 배달 대행업체로 등록된 대한퍼스트는 실은 대포통장을 만들어 범죄 조직에 파는 유령 회사였다. 유 씨의 돈을 가로챈 투자 사기 조직은 따로 있었고, 대한퍼스트는 그 돈을 받아 숨겨주는 통로 역할을 했다.

문제의 대한퍼스트를 설립한 김철민(가명·47)은 2024년 10월 붙잡혔다. 법원은 김철민을 사기 공범으로 보고 유 씨에게 투자금을 전액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유 씨는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김철민이 돈이 없다고 버텼기 때문이다. 더 기가 막힌 건 유 씨가 돈을 넣었을 때 대한퍼스트는 이미 폐업 상태였다는 점이다. 사망한 회사의 통장이 범죄 수익을 실어 나르는 동안 국세청도, 은행도 경고하지 않았다.

보이스피싱, 투자 사기, 온라인 도박…. 형태는 다양했지만 돈이 오간 통로는 하나, 대한퍼스트의 대포통장이었다. 확인된 것만 30개의 통장에 유 씨를 포함해 최소 189명이 돈을 뜯겼다.

한 해 새로 만들어지는 대포통장은 32만 개로 추산된다. 검은돈이 오가는 혈관이다. 범죄 조직은 대포통장이 없으면 돈을 받을 수도, 숨길 수도 없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최근 5년(2021~2025년)간 금융감독원에 등록된 보이스피싱 통장 12만6866개를 분석하고 올 1월부터 5개월간 대포통장 공급 조직 관계자 4명과 피해자 10명, 수사기관 관계자 9명 등 총 58명을 접촉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법망의 틈새에서 범죄의 핵심 부품인 대포통장은 쉴 새 없이 찍혀 나오고 있다.

아내 병원비-딸 결혼자금까지… 대포통장 1개社, 189명에 39억 뜯어


피해자 신고보다 빠르게 하루 876개꼴 생겨나
개인 아닌 회사 명의는 사실상 송금 한도 없어
사기-도박-피싱에 5000만원-4500만원 줄송금

대표 잡고보니 무일푼… 배후는 3년째 도피중
폐업후에도 차단 안된채 피해자 돈 실어날라
배관공 양재호(가명·52) 씨는 사기 사건으로 대한퍼스트 통장으로 흘러 들어간 5000만 원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 3년 동안 모은 돈이었다. 4월 초 서울에 있는 일터에서 만난 그가 들고 있는 건 판결문에 나온 대한퍼스트 피해자의 명단이다.
배관공 양재호(가명·52) 씨는 사기 사건으로 대한퍼스트 통장으로 흘러 들어간 5000만 원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 3년 동안 모은 돈이었다. 4월 초 서울에 있는 일터에서 만난 그가 들고 있는 건 판결문에 나온 대한퍼스트 피해자의 명단이다.
대포통장은 사기든 도박이든 마약이든, 돈이 오가는 거의 모든 범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범죄 조직은 피해자에게서 뜯어낸 돈을 대포통장을 거쳐 현금으로 빼낸다. 대포통장이 없으면 돈을 받을 수도, 숨길 수도 없다. 거꾸로 말하면 이 통장의 흐름만 틀어막아도 범죄 조직은 괴사한다. 검은돈이 흐르는 혈관을 조이는 셈이다.

그런데 이 혈관은 사실상 방치돼 있다. 한 해 새로 만들어지는 대포통장만 32만 개, 하루 876개꼴로 추산된다. 금융감독원의 보이스피싱 통장 데이터를 토대로 황석진 동국대 국제정보보호대학원 교수의 디지털금융범죄대응연구소가 분석한 결과다. 연구소는 “이마저도 적게 잡은 수치일 수 있다”고 했다. 보이스피싱을 뺀 도박, 마약, 투자 사기에 쓰인 대포통장은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대포통장 조직이 12조 원을 세탁하다 적발된 적도 있다.

이 지하 혈관을 만드는 비용은 생각보다 훨씬 적었다. 신용불량자 한 명과 6일이면 충분했다.

● 같은 통장으로 흘러든 189명의 돈
김진영(가명·59) 씨는 딸의 결혼식 자금 1500만 원을 사기당해 대한퍼스트가 만든 회사 대포통장으로 잃었다. 4월 중순 전남 자택에서 만난 그는 “사기를 당했다는 수치심에 딸에게도 피해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고 했다.
김진영(가명·59) 씨는 딸의 결혼식 자금 1500만 원을 사기당해 대한퍼스트가 만든 회사 대포통장으로 잃었다. 4월 중순 전남 자택에서 만난 그는 “사기를 당했다는 수치심에 딸에게도 피해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고 했다.
대한퍼스트의 통장을 통해 돈을 잃은 피해자는 최소 189명. 그중엔 배관공 양재호(가명·52) 씨도 있었다. 그는 2023년 9월 유튜브 광고에서 해외 대학교수가 인공지능(AI) 투자 플랫폼을 소개하는 영상을 봤다. 반신반의했지만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는 수익 인증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그는 두 달 후 3년 동안 모은 5000만 원을 넣었다.

그런데 석 달 후인 12월 19일, 투자 사이트는 먹통이 됐다. 수익률은 가짜였다. 광고 속 교수는 대역료 30만 원을 받은 배우였다. 그가 보낸 돈은 추적할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진 상태였다. 피해 이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치매를 앓는 어머니와 단둘이 산다. 경찰 조사에서 그는 “지금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살아 있는 게 다행일 정도”라고 했다.

남옥순(가명·68) 씨는 빵과 옷을 팔아 모은 노후 자금 900만 원을 잃었다. 김진영(가명·59) 씨는 딸의 결혼식 자금 1500만 원을 날렸다. 이들이 처음 돈을 보낸 곳은 평범한 개인 명의 통장이었다. 여기에 돈을 넣으면 조직이 곧바로 대한퍼스트의 회사 통장으로 옮겨 인출했다. 피해자로서는 대포통장인지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해외에서는 돈을 보낼 때 범죄에 연루된 의심 통장이라고 알려주기도 하지만, 한국에는 아직 그런 장치가 없다. 남 씨는 주 6일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생계를 잇는다. 김 씨는 딸에게조차 아직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대한퍼스트의 통장은 투자 사기에만 쓰이지 않았다. 보이스피싱 조직도, 온라인 도박 조직도 이 통장을 거쳐 돈을 받았다. 확인된 범죄 조직만 5개다. 도박 사이트 이용자 중에는 고등학생도 있었다. 보이스피싱 피해 30건도 이 통장을 거쳤다. 그렇게 끌어모은 피해액만 39억 원이었다.

대포통장에도 등급이 있다. 대한퍼스트의 회사 통장은 개당 500만 원 선에 거래돼 개인 명의 통장보다 2배 이상 비쌌다고 한다. ‘빠른 현금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새로 만든 개인 통장은 하루 송금 한도가 300만 원에 불과하다. 피해자가 신고하기 전에 거액을 빼내기 어렵다. 가상자산(코인) 지갑으로 빼돌리는 방법도 있지만, 주요 거래소는 이상 거래를 잡아내는 시스템을 갖춰 꼬리를 밟힐 위험이 크다. 반면 회사 통장은 사실상 한도가 없어 수십억 원도 한꺼번에 현금으로 뽑을 수 있다.

대포통장을 구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과거엔 보이스피싱 조직이 직접 노숙인이나 불법 체류자를 꼬드겨 통장을 사들였다. 그런데 통장이 워낙 중요해지자, 이제는 대포통장만 전문으로 공급하는 조직이 따로 생겨 사기 조직과 분업한다. 통장과 OTP, 명의자 신분증까지 한 묶음으로 넘기고 한 달 단위로 빌려주는 ‘구독’ 방식이다. 범죄 세계에서는 대포통장 조직이 ‘갑(甲)’이다. 대한퍼스트가 바로 그런 조직이었다.

또 다른 무기는 ‘일회용 통장’으로 불리는 가상계좌다. 대한퍼스트는 결제 대행사와 e메일, 우편만으로 가맹점 계약을 맺고 회사 통장을 기반으로 가상계좌를 발급받았다. 거래마다 새 번호가 붙기 때문에 사실상 동결되지 않고, 원래 통장도 무사했다. 피해자가 신고하는 속도보다 새 통장이 생기는 속도가 빨랐다.

● 마담이 빌려준 돈으로 6일 만에 회사 세워
범죄 조직들은 자취를 감췄지만, 대한퍼스트를 세운 김철민의 이름은 수사망에 포착됐다. 경찰은 추적 끝에 2024년 10월 그를 체포했다. 법원은 김철민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며 “유령 회사를 세운 뒤 그 통장을 범죄 수익 세탁에 제공한 죄책이 무겁다”고 꾸짖었다.

유종수 씨는 김철민에게 주목했다. 아내의 병원비를 대려면 대한퍼스트의 통장을 거쳐 사라진 4500만 원 중 일부라도 되찾아야 했다. 그는 변호사에게 수임료 620만 원을 주고 김철민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다.

하지만 법원에서 드러난 김철민의 실체는 초라했다. 그는 55만 원짜리 월세방에 사는 신용불량자였다. 범행 전에는 물류센터나 갈빗집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었다. 그러다 텔레그램에서 ‘김수현’을 만났다. 김수현은 “회사를 만들어 주면 3억 원을 대출해 주겠다”고 했다. 룸살롱 마담에게서 빌린 1000만 원을 자본금인 척하고 잔액 증명서를 내니 사업자등록증이 나왔다. 회사 명의로 통장을 받기까지 6일이면 됐다.

유 씨는 소송에서 이겼지만 김철민은 빈털터리였다. 그에게 배상을 요구한 사람만 19명이 더 있었다. 배후의 김수현은 3년이 지난 지금껏 잡히지 않고 있다.

● 폐업한 회사, 닫히지 않은 통장
대한퍼스트가 폐업한 뒤에도 그 통장은 금융망에서 차단되지 않고 살아 움직이며 피해자의 돈을 실어 날랐다. 국세청은 2023년 10월 12일 대한퍼스트를 폐업 처리했다. 유 씨는 그로부터 6일 뒤 대한퍼스트의 통장을 거쳐 돈을 뜯겼다. 통장이 온라인 도박에 쓰인 건 폐업한 이후인 2023년 12월부터였다. 보이스피싱 피해액 30건 중 9건도 폐업 이후 통장을 거쳐 갔다.

국세청은 “회사 통장 개설과 폐쇄는 금융위원회 소관”이라고 했다. 금융위는 “통장 주인이 스스로 신고하지 않으면 폐쇄가 어려운 구조라 개선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경찰도 통장을 강제로 닫을 권한은 없다.

유 씨는 이제 남아 있던 전세보증금 5000만 원도 거의 다 쓴 상태다. 피해를 당한 뒤 한쪽 눈이 급격히 나빠져 종종 병원 신세를 진다. 4월 1일 서울 노원구 그의 자택 서랍장 위에는 베트남전쟁 참전으로 받은 유공 증서만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몇 번이고 들여다봐 너덜너덜해진 판결문을 손에 든 그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이제 판결문 글씨가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남옥순(가명·68) 씨의 900만 원도 대한퍼스트의 통장으로 세탁됐다. 노후 자금으로 모아뒀던 900만 원이었다. 4월 초 경기 파주시에서 만난 남 씨는 송금 내역이 담긴 휴대전화를 들어 보이며 “사람이 없으면 없을수록 진흙탕에 들어간다”라고 했다.
남옥순(가명·68) 씨의 900만 원도 대한퍼스트의 통장으로 세탁됐다. 노후 자금으로 모아뒀던 900만 원이었다. 4월 초 경기 파주시에서 만난 남 씨는 송금 내역이 담긴 휴대전화를 들어 보이며 “사람이 없으면 없을수록 진흙탕에 들어간다”라고 했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히든: 검은돈의 혈관, 대포통장’은 각종 범죄의 핵심 도구인 대포통장 문제를 조명했습니다.

〈히어로콘텐츠팀〉
▽팀장: 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
▽취재: 임재혁 손준영 조승연 기자
▽사진: 박형기 기자
▽편집: 하승희 봉주연 기자
▽그래픽: 김충민 기자
▽인터랙티브 기획: 김재희 기자
▽인터랙티브 개발: 임희래 ND
▽인터랙티브 디자인 및 영상: 정시은 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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