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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정치

민주화 탄압 철권통치… ‘언론 통폐합’ 재갈 물려놓고 부정축재

입력 2021-11-24 03:00업데이트 2021-11-24 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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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사망]
대통령 재임 8년간의 행적
사망자 168명(군경 포함), 행방불명 206명, 부상자 847명. 1980년 6월 당시 최규하 대통령이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해 보고받은 피해 상황이다. 하지만 실제로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한 피해자는 376명으로 늘어났고 당시 부상자는 3000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국가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은 5·18민주화운동 3개월 뒤인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1980년 8월 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5·18민주화운동은 1988년까지 8년간의 집권 기간 동안 철권통치로 민주화를 탄압했던 전 전 대통령의 출발점이었다.

○ ‘신군부 독재’로 점철된 5공화국
1981년 3월 간접선거로 12대 대통령 취임
최 대통령을 압박해 하야시킨 뒤 집권한 전 전 대통령은 5공 헌법을 만들고 1981년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는 ‘비리·부패·정쟁의 근절’을 내걸었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특히 전 전 대통령이 집권 당시 사회악을 일소하겠다며 특별조치로 설치한 삼청교육대는 무고한 일반인들까지 구금하던 독재통치의 상징과도 같았다. 입법부는 고사하고 검찰과 경찰, 사법부인 법원도 ‘권력의 시녀’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의 재임기는 줄곧 “연장된 군부 독재 정권”이라며 “박정희 없는 박정희 시대”라고 불리기도 했다.

1989년 12월 국회 5공 비리 청문회 참석, 5·18민주화운동 진압을 ‘자위권 발동’으로 진술
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결과 당시 삼청교육대에는 약 4만 명이 강제로 징집돼 54명이 사망한 것으로 조사됐다. 최소 4명 이상은 폭행으로 숨졌고 병사나 자살로 처리된 이들은 사인이 조작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결과 발표도 이어졌다.

전두환 정권은 야당 인사들과 대학생들에게 친북 용공 혐의를 덧씌워 고문을 자행하기도 했다. 1980년대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친 이근안 씨는 전두환 정권에서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등 민주화 인사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 강제 감금하고 잔혹하게 고문했다. 대학가에는 안전기획부와 보안사령부 요원들이 학생들을 감시했고, 이들을 수시로 잡아와 탄압하며 민주화의 싹을 짓밟았다.

○ 언론에 재갈 물려놓고 부정축재 일삼아
‘4·13 호헌 조치’ 다음날 임시국무회의 전두환 전 대통령(가운데)이 1987년 4월 14일 청와대 임시국무회의에 앞서 각료들과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은 전날(13일) 국민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거부하는 ‘4·13 호헌 조치’를 발표했다. 동아일보DB
전 전 대통령은 집권 첫해인 1980년 언론통폐합 조치를 단행했다. ‘언론창달계획’으로 포장해 전국 64개 언론사를 신문사 14개, 방송사 3개, 통신사 1개로 강제 통폐합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의 실세로 통하며 언론통폐합을 주도했던 허문도 전 국토통일원 장관은 훗날 ‘전두환 정권의 괴벨스’로 불렸다.

1980년 5월 동아일보는 ‘무사설(無社說) 저항’으로 신군부 독재에 맞섰지만 전 전 대통령은 집권 전후 대대적인 언론인 숙청을 강행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동아일보사의 동아방송(DBS) 포기를 강요했고 1963년 첫 전파를 발사했던 동아방송은 1980년 11월 30일 고별 방송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언론의 입을 틀어막은 전두환 정권은 집권 내내 권력형 비리가 이어졌다. 기업으로부터 통치자금을 조성해 부정축재에 열을 올렸다. 1982년 이철희 장영자 어음사기사건이 대표적이었다. 장영자 씨의 형부는 전 전 대통령 부인의 삼촌이었고, 장 씨 사건을 강력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당시 정권의 ‘2인자’ 허화평 대통령제1정무수석비서관은 직언을 했다는 이유로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야 했다. 전 전 대통령 스스로도 재임 기간 동안 9500억 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해 재판을 받았다.

○ 민주화 열망에 무너진 전두환 정권
1987년 1월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 발생
아이로니컬하게도 전 전 대통령은 민주화를 탄압하기 위해 자행했던 숱한 고문과 폭력에 스스로 발목이 잡혔다. 1987년 1월 남영동 대공분실에 고문을 받다가 숨진 박종철 열사의 사인을 세상에 드러낸 건 동아일보의 특종 보도였다. ‘탁 치니 억 하고’ 사망했다는 당국의 발표가 고문치사를 숨긴 조작이었다는 사실을 파헤친 것. 이 사건은 6·10민주항쟁으로 이어졌고 4·13호헌(護憲·현행 헌법 유지) 조치로 대통령 직선제를 거부했던 전 전 대통령은 결국 민주화의 열망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강경석 기자 cool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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