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당의 지평 넓힌 간판스타… 정치현실의 벽 앞에 무너져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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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의원 투신사망]비극으로 마침표 찍은 ‘진보 아이콘’

빈소 찾은 문희상 국회의장 문희상 국회의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유인태 국회사무총장(왼쪽)이 23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 부인 김지선 씨와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빈소 찾은 문희상 국회의장 문희상 국회의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유인태 국회사무총장(왼쪽)이 23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 부인 김지선 씨와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수배된 몸으로 용접공 생활을 할 때가 훨씬 행복했다.”

23일 세상을 떠난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는 국회에 입성한 뒤에도 각종 인터뷰에서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세속의 풍파에 덜 시달려 마음이 맑았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노 원내대표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거치며 바닥에서 쌓은 내공으로 진보 정치를 대중화시킨 주인공이었다. 그런 만큼 불법 정치자금 수수와 관련된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한국 진보 정치사에 무엇보다 뼈아픈 대목으로 기록될 듯하다.

○ 첼로 소년에서 노동운동가로

1956년 부산에서 태어난 노 원내대표는 부유하진 않았지만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집안에서 자랐다. 다른 학교에 초청받아 연주할 정도로 첼로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하지만 고교 입시를 준비하며 서울에 머물던 1972년 10월 유신 때 광화문에 진주한 탱크와 장갑차를 보고 인생의 궤적이 바뀌었다. 노 원내대표는 경기고를 다닐 때 이미 ‘박정희 타도’ 유인물을 뿌려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됐다. 당시 유인물 제목을 쓴 사람은 같은 반 친구였던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었다. 비평준화 마지막 세대인 노 원내대표의 경기고 72회 동기 중에는 황교안 전 국무총리도 있다.

노 원대대표는 고려대 진학 후 5·18민주화운동을 보고 “계몽적 운동의 한계를 절감했다”며 용접 자격증을 따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같이 노동운동을 하던 배우자를 만나 결혼했으나 1년 만에 구속돼 3년 동안 수감 생활을 했고, 시기를 놓쳐 아이도 갖지 못했다. 출소 후 노동정당 설립을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를 설득해 1997년과 2002년 대선을 치렀다.

정치인 노회찬이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한 것은 2004년 17대 총선 때였다. “50년 동안 구워 온 불판을 갈아야 한다” 등 노동 현장에서 갈고닦은 촌철살인 화법이 대중의 호응을 얻으면서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비례 8석을 포함해 모두 10석을 얻으며 ‘44년 만의 진보정당 원내 진출’이라는 개가를 올렸다.

당시 민노당은 무상교육, 무상의료, 부유세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 진보 정치의 현실적 한계, 그리고 극단적 선택


노 원내대표는 생전에 진보정당의 대중화를 막는 요인으로 ‘정파주의’를 꼽았다. 수차례 몸소 경험한 당내 계파 싸움의 폐해 때문이었다. 민주노동당 발족 때부터 일었던 해묵은 자주파(민족해방계열·NL)와 평등파(민중민주계열·PD)의 갈등은 2008년 친북주의 청산을 둘러싼 전면적 대립을 일으켰고 노회찬 심상정의 탈당으로 이어졌다.

통합 진보정당을 꿈꿨던 노 원내대표는 이후 진보신당을 만들고 2011년 말 다시 통합진보당에 참여했다. 하지만 당내 부정경선과 폭력사태를 겪으며 이석기 전 의원 등 주류와 갈라서 진보정의당을 만들었고 이는 정의당으로 이어졌다. 노 원내대표는 주위에 당시를 돌이켜 “이석기는 통진당 내 지하당이었다”고 몸서리쳤다.

진보정당 외길을 걸으며 노 원내대표는 늘 돈 문제로 힘들어했다. 그는 2004년 첫 원내 입성 직후 인터뷰에서 “갖고 있던 5개의 신용카드가 모두 정지됐다. 신용불량 상태로 출마하는 게 염치가 없어 친지들에게 돈을 빌려 빚을 모두 갚고 출마했다”고 말했다.

의원이 된 후에도 생활비가 모자란 건 마찬가지였다. 민주노동당은 소속 의원들에게 세비를 당에 내고 매달 180만 원만 받아서 쓰게 하는 바람에 기고, 강연 등을 통해 모자란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다. 노 원내대표는 지난주 워싱턴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의원이 아닐 때 1년에 100∼150회 강연을 해 강연료가 기억이 안 날 정도”라고 했다. 진보당 관계자는 “급할 때 주변에 신세를 지는 경우가 많다 보니, 고교 동창(드루킹 사건 관련자인 도모 변호사)으로부터 돈을 받았을 때 판단을 잘못한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이인혁 인턴기자 중앙대 신문방송학부 4학년
#노회찬#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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