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근들이 기억하는 ‘YS의 인간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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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내게 등돌린 사람도 한때 함께 고생” 회고록에 배신 사례 쓰지 말라 엄명
사고 터질 때마다 장관 경질… “나를 못자르니 수족 잘라 사과”

“왜 이렇게 자주 장관을 바꾸셨어요?”

1998년부터 2001년까지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회고록 집필을 도운 김동일 씨가 회고록 자료를 정리하다가 YS에게 물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등 유난히 사건 사고가 많았던 김영삼 정부에선 장관의 평균 재임기간이 11.6개월로 1년이 채 안 됐다. YS는 이렇게 답변했다.

“큰일이 일어나면 대통령으로서 국민에게 무조건 죄송한 거다.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로 끝내선 안 된다. 나를 자를 순 없으니 내가 믿고 의지한 수족을 잘라 국민에게 내 마음을 전하려 한 것이다.”

김 씨는 23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당시 YS와 나눈 대화를 전하며 “지도자로서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자세를 봤다”고 말했다. 김 씨는 당시 회고록 정리를 위해 많은 재야인사를 만났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는 YS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도 훗날 YS 비판에 앞장선 인사도 꽤 있었다. 이들의 행적을 회고록에 담자고 하자 YS는 곧바로 “쓰지 마라”라고 엄명했다. 그러면서 “내가 회고록을 쓰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남기려는 것이다. 그들도 나와 함께 고생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YS 재임 기간 청와대 행정관을 지낸 새누리당 이진복 의원도 비슷한 일화를 전했다. 몇 년 전 YS가 부산지역 의원들과 만찬을 했을 때다. 한 의원이 1987년 대선 당시 YS가 부산 수영만에서 100만 명을 모아놓고 유세를 한 일화를 꺼내자 YS는 “주변 사람들이 고생 많이 했대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예전에 상도동 집에 가면 YS는 늘 ‘밥 묵고 가래이’ ‘고생 많재’라며 다독여줬다”며 “서슬 퍼런 시절 상도동계를 움직인 것은 YS의 인간미”라고 말했다.

부인 손명순 여사에 대한 YS의 애틋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일화도 많다. 퇴임 이후 YS 부부는 힘든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외환위기로 국가가 휘청거린 데다 아들 현철 씨는 재판 중이었다. YS는 우울해하는 손 여사를 위해 “같이 노래하자”며 장난스럽게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고 한다.

YS가 재임 기간 가장 보람을 느낀 일은 무엇일까. 이 질문을 2003년경 일본 경제인이 YS에게 했다. 당시 YS는 일본 와세다대 특명교수로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YS를 수행한 임수택 씨는 “YS는 ‘1994년 북핵 위기로 한반도에 긴장감이 극대화됐을 때 전쟁을 막은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한국 정치사에 숱한 기록을 남긴 YS가 가장 애착을 느낀 것은 ‘26세 최연소 국회의원’이라고 한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33세에 당선된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는 당선 직후 YS를 만나 “선거 때 ‘너무 어리다’고 하기에 ‘김영삼 대통령은 26세에 국회의원을 했다. 나는 너무 늦었다’고 말하니 다들 수긍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YS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고 한다.

이재명 egija@donga.com·홍수영 기자
#김영삼#회고록#장관경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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