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태’ 참사… 정치 ‘중태’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13일 03시 00분


靑“국민 모독 폭언” 與“원내 일정 중단”
홍익표 “부적절 발언 사과” 대변인 사퇴

이정현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이 12일 춘추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변인의 ‘귀태(鬼胎)’ 발언에 대해 국민과 대통령에게 사과할 것을 공식 요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정현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이 12일 춘추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변인의 ‘귀태(鬼胎)’ 발언에 대해 국민과 대통령에게 사과할 것을 공식 요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귀태(鬼胎).’

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썼다는 생소한 용어가 한국 정국을 뒤흔들었다. ‘귀태’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변인이 12일 사과와 함께 원내대변인직을 사퇴했다.

홍 원내대변인은 오후 7시 반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브리핑 과정의 일부 부적절한 발언에 대해 사과의 말씀 드린다”며 “책임감을 느끼고 원내대변인직을 사임한다”고 말했다. 새누리당이 그의 귀태 발언을 이유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예비 열람 등을 전면 거부해 국회가 파행으로 치닫자 물러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민주당 김한길 대표는 김관영 수석대변인을 통해 “원내대변인의 발언은 보다 신중했어야 한다.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국가정보원 국정조사 등 모든 국회 일정이 정상화되길 바란다”고 사과했다.

홍 전 대변인은 11일 오전 현안 브리핑에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와 박정희’라는 책을 인용해 “이 책에 귀태라는 표현이 있다. ‘귀신 귀(鬼)’자에 ‘태아 태(胎)’자를 써서 그 뜻은 태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태어났다(는 것)”라며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세운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에 만주국의 귀태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아이러니하게도 귀태의 후손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한국과 일본의 정상으로 있다”고 말해 파문이 일었다.

청와대는 12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망치고 국민을 모독하는 폭언이자 망언”이라며 민주당의 사과를 요구했다. 새누리당도 긴급 최고위원회를 열어 홍 대변인의 원내대변인직 사퇴, 민주당 김한길 대표의 사과 등을 요구하며 원내 일정을 전면 중단했다. 새누리당은 또 홍 전 대변인을 국회 윤리위원회에 제소했다.

민주당은 홍 원내대변인의 사퇴로 이번 사태를 일단락 짓겠다는 의도지만 청와대 분위기는 다르다. 청와대가 ‘대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대통령의 정통성을 부정한 민주당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지적한 만큼 그에 대한 민주당의 성의 있는 입장 표명이 있어야 한다는 기류가 강하다. 단순히 홍 대변인이 사퇴한 것은 진정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학)는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실망감이 더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靑 “박근혜정부 정통성 부정” 민주비판 앞장 ▼

○ 새누리 “홍 대변인 진정성 의심돼”


새누리당은 12일 민주당 홍익표 전 원내대변인의 ‘귀태’ 발언 사과와 원내대변인직 사퇴에도 “진정성 있는, 국민 눈높이에 맞는 사과가 있어야 한다”며 즉각 수용을 보류했다. 김태흠 원내대변인은 “애초 요구한 것의 70∼80%밖에 충족되지 않았다”며 “진정성 여부 판단은 13일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김한길 대표가 조속한 국회 정상화를 요구한 데에 바로 답을 내놓지는 않은 것이다. 국회 정상화 여부는 주말을 거쳐야 정리될 것으로 전망된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정국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12일 오전 10시 반 소집된 긴급 최고위원회의에서 황우여 대표는 “국가원수 개인에 대한 직접적인 명예훼손이자 모독”이라며 민주당 지도부 등의 사과를 촉구했다. 최경환 원내대표는 “절대 묵과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성토했다. 강은희 원내대변인은 홍 전 대변인의 국회의원직 사퇴를 촉구하기까지 했다.

이 같은 대응은 청와대의 강경 기류를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이정현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은 홍 전 대변인의 발언 당일(11일) “승복도 하나의 소양이고 리더의 자질”이라고 한 데 이어 12일 오전에는 “국회의원이 했다고는 볼 수 없을 정도의 폭언이고 망언”이라고 공세 수위를 높였다. “국민이 선택한 대통령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고 자유민주주의에 정면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며 “이 발언이 민주당의 당론인지 분명하게 입장을 밝혀야 하며 국민과 대통령께 정중히 사과해야 한다”고도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교묘하게 책을 인용하고, 그것도 박근혜 대통령을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비교한 점에 비춰 보면 의도성이 다분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 청와대 수뇌부는 “치밀하게 준비된 발언이고, 단순한 모욕성 막말이 아닌 정부의 정통성을 흔드는 일”이라는 데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은 대응 방안에 대해 직접 언급은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청와대가 하룻밤 사이 대응 수위를 높인 데에는 박 대통령의 불편한 심기가 반영됐다는 관측이 많다.

○ 민주 “발언 보다 신중했어야”

민주당은 오후까지만 해도 강공으로 맞받았다. 새누리당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예비열람 등 국회 일정에 전면 불참하기로 한 것을 “국정원 국정조사 물타기”, “국회 무시”라고 비판하면서 예정된 국회 일정을 그대로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내에서는 잇따른 막말 파동 등 당내 강경파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홍 전 대변인이 4월 자신의 트위터에 “18대 대선 결과는 무효입니다. 부전여전, 아버지 박정희는 군대를 이용해서 대통령직을 찬탈했고, 그 딸인 박근혜는 국정원과 경찰 조직을 이용해 사실상 대통령직을 도둑질한 것입니다”라는 글을 올린 사실이 드러난 것도 당내 분위기를 바꿔놨다. 결국 홍 전 대변인의 당직 사퇴와 김한길 대표의 유감 표명으로 이어졌다. 김 대표는 오후 긴급 지도부 회의에서 “국민의 뜻을 받아들이는 게 최선”이라며 유감 표명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관영 수석대변인은 기자들과 만나 “무엇보다 국회 정상화가 중요하다는 생각에 신속한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빠듯한 국회 일정도 민주당을 압박하는 요인이 됐다. 공공의료 국조특위의 활동 마감일은 13일. 국조특위 청문회에 출석하지 않은 홍준표 경남도지사 고발 여부 결정은 14일 이후로는 불가능해진다. 김 수석대변인은 “새누리당만 동의한다면 공공의료 정상화 국정조사 특위 회의를 토요일인 13일 열 수 있다”고 했다.

황승택·길진균·동정민 기자 hst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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