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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년 1월 9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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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가족모임과 피랍탈북인권연대는 8일 “한국으로 귀환한 납북자 이재근(68), 진정팔(66), 고명섭(63), 김병도(53) 씨 등 납북자 4명이 북한 조선노동당과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에게 피해 배상을 요구하는 고소장을 9일 접수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씨 등은 이 고소장을 국가인권위원회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보내고 이를 판문점을 통해 북한에 접수시켜 줄 것을 통일부에 요구하기로 했다.
이들은 미리 작성한 고소장에서 “북한에 의해 강제로 납치돼 30년 동안 감금과 폭행, 강제노역을 당했다”며 “이로 인해 받은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배상하는 차원에서 북한 조선노동당은 1인당 1억 달러씩 총 4억 달러를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앞서 2000년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들은 6일 판문점을 통해 과거 남한 군사정권 시절 고문 등 탄압에 대한 배상으로 10억 달러를 요구하는 공동고소장을 국가인권위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에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도희윤(都希侖) 피랍탈북인권연대 사무총장은 “오래전부터 북한 정부에 납북자 피해배상요구를 준비했으나 최근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들이 남한 정부에 고소장을 보냈다는 소식을 듣고 이 계획을 앞당겼다”며 “이를 계기로 남한 정부도 납북자 생사 확인 및 송환에 적극적으로 나서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정부 당국자는 8일 “비전향장기수의 고소장 내용이 별 가치가 없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면서 “고소장을 국가인권위원회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전달할지 여부를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떠올리기도 싫은 북한에서의 비참한 삶을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겠습니까.”
■ 이재근씨가 말하는 北에서의 30년
8일 오후 서울 송파구 신천동 납북자가족모임 사무실. 고소장의 수신자란에 적힌 북한 조선노동당이란 글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이재근 씨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저인망 어선 봉산22호의 선원이었던 이 씨는 1970년 4월 29일 서해 연평도 근해에서 조업 중 동료 26명과 함께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북됐다. 당시 납북된 동료 가운데 19명은 7개월 만인 11월 29일 어선과 함께 송환됐으나 이 씨 등 8명은 북한에 강제 억류됐다.
그는 북한에서 대남적화통일을 위한 간첩 양성기관인 중앙당 정치학교에 입교해 2년 6개월간 남파간첩 특수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사상 불량’으로 대남공작부서에 배치되지 못한 이 씨는 25년간 함경남도 함주군 선박전동기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이 씨의 북한에서의 삶은 지옥 그 자체였다. 단 하루도 북한 당국의 감시와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그는 식량난을 견디다 못해 북한에서 결혼한 아내와 아들 등 일가족 3명과 함께 1998년 8월 북한을 탈출했다.
이 씨는 “북한에서 간첩교육을 받으며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다음 날 오전 2시까지 한순간도 쉬지 못했다”며 “특히 수영훈련 때는 나를 강제로 물속에 밀어 넣고 24시간 이상 방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들이 피해 배상을 요구했다는데 그들은 남한 정부의 인도적인 조치에 의해 편안하게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지만 납북자들은 지금도 고향에 돌아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다”며 “그들과 우리를 비교할 수는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이재근 씨의 납북에서 귀환까지 | |
| 1970년 4월 | 서해 연평도 인근에서 납북됨 |
| 10월 | 간첩 양성기관에서 특수훈련 |
| 1973년 8월 | 함경남도 함주군 선박전동기 공장에서 강제노역 |
| 1998년 8월 | 일가족 3명과 중국으로 탈출 |
| 2000년 6월 | 한국 귀환 |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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