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축’보다 표현 완화됐지만…

  • 입력 2005년 1월 19일 18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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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 내정자가 18일 상원 외교위원회 인증청문회에서 북한을 ‘폭정의 거점(outposts of tyranny)’으로 규정해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발언은 2002년 1월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의 일원이라고 지칭한 것보다 강도는 약하지만 북한 체제를 ‘폭정’으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북한의 반발이 예상된다.

정부 당국자는 “명분을 중시하는 북한의 태도로 볼 때 폭정, 공포사회 등의 단어를 사용하며 체제를 비난한 라이스 내정자의 발언에 어떤 식으로든 불쾌감을 표시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악의 축’ 발언은 ‘9·11테러’ 사건 4개월 뒤인 2002년 1월 29일 부시 대통령이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행한 연두교서에서 언급한 내용.

당시 부시 대통령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국가들인 북한과 이라크, 이란이 세계에서 가장 파괴적인 무기들로 미국을 위협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들 국가는 세계평화를 위협하려고 무장하는 악의 축”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북한은 즉각 외무성 대변인을 통해 “자주적인 주권국가에 노골적인 침략 위협을 가했다”며 “선전포고로 간주한다”고 반발했다.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은 한반도 정세에 찬물을 끼얹었다. 북-미관계는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의 2002년 10월 평양 방문 시 북한 측이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의 보유를 시인해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전봉근(田奉根) 평화협력원장은 “부시 대통령이 미국의 기본적인 대북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함으로써 향후 북-미관계가 얼어붙는 원인(遠因)을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이에 비해 라이스 내정자의 ‘폭정의 거점’ 발언은 미국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유민주주의를 확산하겠다는 ‘큰 구상(grand design)’을 밝힌 일종의 수사(修辭)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즉 미국이 북한을 포함해 ‘폭정의 거점’으로 부른 6개국은 큰 위협이라기보다는 세계에 고립무원으로 산재해 있는 ‘1인 독재’ 또는 ‘권위주의’ 체제를 범주화(categorized)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얘기다. 실제 북한 미얀마 쿠바 등이 서로 연계해 세력화할 가능성은 적다.

통일연구원 박영호(朴英鎬) 선임연구위원은 “증거를 찾기 어려운 대량살상무기(WMD)에 비해 자유민주주의의 확산은 국제사회에 덜 거부감을 주는 이슈”라며 “자유민주주의 전도사를 자임하는 미국이 추진하는 국제질서에 걸림돌이 되는 나라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라이스 내정자의 발언이 6자회담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하는 분위기다.

외교통상부 당국자는 “북한은 용어에 집착하지 말고, 이제는 외교의 시대이며 미국이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메시지에 주목해야 할 것”이라며 “북한이 비난성명을 낼 경우 자유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에 반대한다는 모습으로 비쳐 유리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Outposts of Tyranny’ 해석싸고 논란▼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 내정자에 대한 18일 상원 인준청문회가 끝난 뒤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과 한국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그가 말한 ‘폭정의 거점’(Outposts of Tyranny)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기조발언에서 키워드 중 하나로 사용한 만큼 향후 계속 등장할 가능성이 많은 단어인 데다 단순한 번역으로는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국 외교통상부 실무자들도 19일 이 표현을 어떻게 번역할지 회의를 가졌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outpost’는 군대용어로 ‘전초기지’ 또는 ‘전진기지’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해 북한 이란 쿠바 등 6개국을 ‘폭정의 전초기지’라고 번역하면 배후국가가 있을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게 된다.

외교부 관계자는 “라이스 내정자는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을 확산시키겠다’고 강조했다”며 “앞뒤 문맥으로 보면 민주주의와 인권 확산의 대상으로 이해하고 접근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외교부는 실무자들이 추천한 ‘폭정의 잔존지역’ ‘폭정의 거점’ ‘폭정의 전방거점’ ‘폭정의 전진기지’ ‘폭정의 전초기지’ ‘독재의 잔존 거점’ 등 6, 7개의 표현을 검토한 뒤 당분간 ‘폭정의 잔존지역’으로 부르기로 했다.

하지만 일본 언론들은 다양한 표현을 사용했다. 아사히신문은 ‘압제(壓制)의 거점’이라고 번역했고 다른 언론들은 ‘압정(壓政)의 거점’ 또는 ‘압정을 행하는 나라’로 번역했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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