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최영훈/'나쁜 취재원, 좋은 대통령'

  • 입력 2003년 11월 9일 19시 28분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화법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의 말투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선지 노 대통령은 몇 가지 유행어도 만들어 냈다. “맞습니다, 맞고요”라는 특유의 어법이 코미디 프로그램에까지 등장할 정도다. 솔직 담백한 그의 말투는 지지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호감을 줬다.

물론 다른 시각도 있다. 대통령의 말 치고는 가볍고 품위가 없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가 그런 사례 중 하나다. 대부분의 국민은 대통령의 말이 무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대통령의 말투가 기계적이거나 꼭 무거워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권위주의 정부시절 TV에 나와 담화를 발표하던 대통령들의 첫마디는 천편일률적으로 “본인은…”이었다. 권력이 무섭고, 멀리 있던 그 시절 대통령들의 말투는 근엄했다. 낡은 활동기 사진을 되돌려 지금 그런 말투를 듣는다면 두드러기가 날지도 모를 일이다.

대통령의 말은 화법보다 어떤 내용을 담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무엇보다 할 말과 하지 않아야 할 말을 잘 가려야 국민의 한결같은 신뢰를 얻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노 대통령이 2일 예정에 없던 기자간담회를 갖고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에 관해 언급한 것은 적절했는지 의문이다. 그는 이 자리에서 대선자금 수사의 범위와 대상, 기업인의 사면 문제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했다.

검찰은 이 발언에 대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검찰 수뇌부는 기자회견을 연기하는 방안도 검토했다는 후문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생각에서 다음날 검찰은 예정대로 수사계획을 발표하기는 했다. 이에 한나라당은 즉각 검찰을 향해 ‘청와대와 짜고 치는 것이냐’며 포화를 퍼부었다. 대통령의 말 때문에 검찰이 공평무사하게 수사를 하더라도 야당의 승복을 이끌어 내기가 쉽지 않게 된 것이다.

대통령이 대선자금 수사 확대와 정치개혁을 연결시키는 바람에 검찰만 난처해진 것이 아니다. 한나라당이 특검 공세를 펼치면서 정치권에 파란이 일고 있다. 이 바람에 정치개혁이라는 시대적 과제마저 정쟁(政爭)의 와중에 휩쓸릴 가능성도 없지 않다.

기자들은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을 좋은 취재원으로 여긴다. 기사로 써먹을 소재를 많이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의 2일 발언은 미리 계산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청와대와 검찰을 연결하는 채널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노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수사 지침을 내려보낸 것 아니냐는 분석은 가능하다. 아무튼 파문과는 무관하게 이런 점에서 노 대통령이 역시 ‘좋은 취재원’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노 대통령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한 변호사는 “그는 어느 자리에서나 주목받고 싶어 하는 경향이 강했다”며 “노 대통령의 다변(多辯)은 스스로 주류이기를 거부했던 정치적 성장 배경에서 연유한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 국정 최고책임자인 그가 때로 ‘돌출 발언’을 하는 것은 면밀한 계산과 함께 과거의 타성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우회적인 지적이다.

토머스 제퍼슨은 “한 마디로 할 수 있는 것을 두 마디로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재능이다”고 일찍이 갈파했다. 노 대통령이 오해받을 만한 사안에 대해서는 말을 다듬고, 말수도 줄여 ‘나쁜 취재원, 좋은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최영훈 정치부 차장 tao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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