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재호/판문점의 캐나다 소녀

  • 입력 2003년 8월 12일 18시 12분


사라 쿠드룸락(15)은 캐나다 누나부트주 누이약 고교 1학년이다. 그는 정전협정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방한한 캐나다 6·25전쟁 참전용사 대표단의 일원으로 지난달 24일 한국에 왔다. 6·25전쟁 때는 태어나지도 않은 소녀가 어떻게 대표가 됐을까. 캐나다 정부는 참전용사 100명을 한국에 보내면서 13개 주에서 한 명씩 청소년 대표를 선발해 함께 가도록 했는데 거기에 뽑힌 것이다.

쿠드룸락양은 백발이 성성한 참전용사 할아버지들의 손을 잡고 판문점과 부산 유엔묘지, 경기 가평군의 영연방군(軍) 참전지역 등을 둘러보았다. 370여명의 캐나다 군인들이 잠들어 있는 유엔묘지에선 옷깃을 여몄고 가평에선 기념비 제막식도 가졌다. 할아버지들이 옛 전우를 생각하며 눈시울을 적실 때는 자신도 가슴이 뭉클했다고 한다.

한국뿐이 아니다. 캐나다는 성지 참배 프로그램(Pilgrimage Program)에 따라 자신들이 참전했던 모든 전쟁 현장에 청소년들을 보내고 있다. 자국(自國) 땅에선 전쟁이 일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해서 아이들에게 뭔가를 보고 배울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참전지역을 방문한 아이들이 맨 먼저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국민적 일체감, 또는 정체성(正體性)의 확인이었을 것이다. 듣도 보도 못한 한국이라는 나라에 와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운 선대(先代)가 자랑스러웠을 것이고, 자신이 그 후손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했을 것이다. 이런 느낌은 자유 평화 민주주의와 같은 국가의 기본가치들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지면서 한 국가의 건강한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줄기찬 국민윤리교육으로 정체성의 위기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어 보이는데도 이리 갈리고 저리 갈려 있다. 한총련 학생들이 미군 장갑차를 점거하더니 8·15 광복절 행사도 보수와 진보가 따로 가질 정도가 돼버렸다.

흔히 ‘민주화, 정보화, 탈(脫)권위주의 과정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닫혀 있던 세상이 열리면서 다양한 생각과 의견이 자유롭게 표출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뼈대까지 흔들려서는 곤란하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한미동맹이 바로 그런 뼈대다. 하나 더 보탠다면 이홍구(李洪九) 전 총리가 말한 ‘남북관계의 상황의 이중성’쯤 되겠다. “북은 화해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대결의 대상이므로 한편으론 대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비해야 한다”는 이 전 총리의 주장은 일종의 공리(公理)가 돼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제1의 조건은 민주적 기본가치를 공유(共有)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공유는 또한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학습을 통해 습득된다고 들었다. 학습까지는 아니더라도 구체적이고 진지한 사회적 통합 노력이 절실한 요즘이다.

이런 말 한다고 “그럼 우리도 북한처럼 혁명전적지 순례라도 시키란 말이냐”라고 비아냥거리지 말았으면 한다. 캐나다는 남의 나라 전쟁터에까지 아이들을 보내 민주국가의 소중함을 체득케 하고 있다. 교훈을 얻을 역사는 있어도 부정해버릴 역사는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재호 논설위원leejaeh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