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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8월 10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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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교류의 주무 부처인 통일부의 정세현(丁世鉉) 장관은 정 회장이 숨진 4일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등 현대아산이 벌여 놓은 여러 가지 남북관계 사업들은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추진되고 있어 남북경협사업에 특별한 영향을 주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조심스럽게 낙관했다.
이와 달리 북한의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는 5일 성명에서 “북남관계의 상징인 금강산관광의 첫 막을 올린 당사자가 타살(북한은 정 회장의 자살이 특검수사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됨으로써 금강산관광을 포함한 북남협력사업들은 그 전도를 예측할 수 없는 일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어두운 전망을 내놓았다.
북한은 그만큼 남북경협에서 정 회장이 차지한 비중이 절대적이었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현대아산의 대북 투자를 제외하면 앞으로 남북경협은 거의 미미한 수준에 그칠 공산이 크다. 도무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대북 경협에 선뜻 뛰어드는 기업은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 회장 사망 직후 현대자동차와 삼성 등이 잇달아 대북 사업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천명하고 나선 것도 이윤 창출이 기업의 존재 이유라는 상식을 고려하면 지극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뛰어난 기업인이었던 정 회장이 이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무모한 대북 사업을 추진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당장은 초기사업비용으로 막대한 자금이 들더라도 이를 통해 대북 사업을 독점하면 장차 남북관계가 크게 개선될 경우 엄청난 이권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을 했을 수 있다. 안타깝게도 ‘판돈’이 달리던 현대아산은 기업의 생존을 건 도박에서 손익분기점을 넘길 때까지 버티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이 같은 경제적 동기 외에 금강산 인근의 강원 통천 출신으로 대북 진출에 남다른 집념을 보였던 부친 정주영(鄭周永) 전 현대 명예회장의 유지를 계승하겠다는 것이 맹목적 대북 투자의 이유였을 수도 있다. 김일성(金日成) 사망 후 한때 유훈통치를 했던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정 회장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시각도 없지 않다.
또 대북 경협이 국익에 부합한다는 정치적 고려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현대아산이 ‘정경분리’의 금도를 넘어 남북정상회담에 관여했다가 곤욕을 치르고 있는 배경이다. 이 대목에서 정부는 정 회장의 죽음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은 정상회담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북한은 금강산관광으로 수억달러를 거머쥐었지만 정작 경협의 선구자였던 정 회장에게 돌아온 것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좌절뿐이었다.
흔히 상인이 밑지고 장사한다는 것은 노인이 어서 죽어야겠다거나, 처녀가 시집가지 않겠다거나, 낚시꾼이 놓친 물고기를 월척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거짓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정 회장의 죽음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돌이켜보면 정 회장은 일방적 교류 협력이 햇볕정책의 ‘만트라(mantra·眞言)’였던 시대의 희생자였다. 그가 정치적 고려 없이 순수하게 기업의 입장에서 대북 사업을 했더라면 오늘날의 비극은 없지 않았을까.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무거운 짐을 덜었지만 그가 유언으로 남긴 남북경협은 우리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한기흥 정치부 차장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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