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核 접근법' 한-일 기류]한국 '對北제재 동참' 딜레마

  • 입력 2003년 6월 9일 18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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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일본 등 국제사회가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원칙을 표명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경제제재 등을 통해 북한을 압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정부가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고심에 빠졌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대북 압력을 병행해야 한다”고 천명하고, 미국의 존 볼턴 국무부 차관이 최근 “마약 판매대금이나 일본 빠찡꼬 자금이 북한에 흘러가는 것을 막겠다”고 선언한 것은 사실상 경제제재 조치 등 대북 압박책을 염두에 둔 발언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딜레마는 현실적으론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에 반대할 명분이 없지만 남북관계를 고려하면 이에 적극 동참하기도 어렵다는 데 있다. 북한은 이미 “경제제재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한 바 있다.

이 때문에 정부는 대화를 통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내부적으론 상황이 악화될 경우의 대비책을 검토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당국자는 “미국 일본이 대북 제재에 나설 경우 한국은 이에 동참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남북경협의 속도조절은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내에선 신규 경협 사업에 대한 승인을 보류하고 개성공단 건설과 도로 연결 사업의 속도를 조절하는 방안 등 단계적이고, 다각적인 대응책이 실무선에서 비상계획(contingency plan)의 하나로 거론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정부는 대북 교역과 식량 등 인도적 지원은 정경분리 원칙에 따라 계속 허용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주목할 만한 것은 남북간의 화해 협력을 강조하는 통일부 내에서도 북핵 문제의 해결을 위해선 어느 정도의 대북압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의견이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 당국자는 “대화를 통해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엔 현실적 대안으로 대북 압박을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길 바라지만 정부는 모든 상황에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는 대북 압박 동참 여부를 내부적으로 검토한다는 사실이 대외적으로 알려질 경우 그 자체가 북한을 자극할 우려가 있어 이를 공론화할 엄두는 못내는 실정이다.

통일연구원 전성훈(全星勳) 선임연구원은 “실제 한국정부의 결심과정에서 국내에서도 (경제제재 동의를 둘러싼) 찬반여부 때문에 엄청난 국론분열이 불가피해 보인다”고 전망했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움직임은 12일부터 미국 하와이에서 열리는 한미일의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 회의를 통해 구체적 윤곽이 잡힐 전망이다.

한기흥기자 eligius@donga.com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제재 카드 꺼내는 일본▼

일본 정부 내의 대북(對北) 정책 기류가 최근 들어 급격히 ‘대화’에서 ‘압박’ 쪽으로 기울고 있다. 대북 강경파, 압력 선호세력의 목소리가 대화론자들을 압도하면서 그간 중립적 위치를 지켜오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도 강경파에 접근 중이란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번 한일정상회담이 이런 흐름을 얼마나 억제할 수 있었느냐에 대해 회의적인 분석도 나오고 있다.

▽총리의 변모=고이즈미 총리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방일 중 정상회담 등을 통해 “북한과 대화를 진행시키려면 일정한 압력이 필요하다”며 대북 압력을 위한 구체적인 수단을 염두에 둔 발언을 계속했다.

이는 미일 정상회담 후 발표문에 ‘압력’이란 표현을 넣을 것인가를 놓고 온건파와 강경파 간에 설전이 있었던 데 비하면 큰 변화다. 고이즈미 총리는 그간 온건파와 강경파의 견해를 종합해 판단해 왔으나 국내 여론이 더 이상 대북 압력을 문제 삼지 않는 방향으로 흐르자 강경파쪽으로 기운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정부 내에서 강경론을 주도하는 인사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관방 부장관을 필두로 외무성의 모테기 도미미쓰(茂木敏充) 부외상, 에비하라 신(海老原紳)북미국장, 방위청의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장관 등이다. 이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방일을 전후한 시기에도 유사법제 전격 통과, 이라크에의 자위대 파견 본격 착수, 만경봉호 입항 견제 등 일련의 흐름을 주도했다. 일본의 일반 국민은 이들이 치밀하게 얽어놓은 ‘테러와 핵’ 위기 속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대북 압력수단=북한 원산항과 일본 니가타(新潟)항을 오가는 만경봉호가 9일 입항계획을 포기한 것과 관련해서도 사실상의 제재가 시작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다.

한일 양국 정부는 만경봉호 등 북한 선박에 대한 집중검사를 대북 경제제재와 별개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마약 운반, 불법 송금, 미사일과 핵 부품 밀반출, 첩보수집 활동 등의 각종 의혹을 내세워 입항시 집중검사를 실시하려던 방침이 만경봉호의 입항 포기로 이어지는 효과를 발휘했다.

북-미-중 3자회담이 속개될 여지가 있어 현재로서는 강경파도 ‘본격적인 대북 경제제재는 시기상조’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북한 핵 위기 해결 노력이 답보 상태에 놓이거나 미사일 재발사, 핵 재처리 강행 등의 사태로 악화되면 대북송금 동결, 북한 관련 일본 내 자산 동결, 해상봉쇄 등의 대북 경제제재 수단을 단계적으로 취할 가능성이 있다.

도쿄=조헌주특파원 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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