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양기웅/외교에 큰 구멍 뚫리고 있다

  • 입력 2003년 2월 18일 19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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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가 실종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대북 송금 문제를 둘러싸고 정쟁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 국제 정치는 그 자신의 고유한 힘 관계와 작동원리에 의해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지금 바깥 세상은 위기다. 그런데 우리는 안의 대결에 사로잡혀 밖을 보지 못하고 있다.

17일 미국 뉴욕타임스는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강행할 경우에 대비해 북한의 무기수출 중단과 총련계 재일교포의 대북 송금 차단 등을 포함한 일종의 ‘맞춤형 제재 방안’을 마련 중이라고 보도했다. 또한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은 13일 상원외교위원회 답변에서 주한미군의 감축 및 재배치를 공식 천명한 바 있다. 북-미 관계의 악화와 한미 동맹의 난기류가 엄습하고 있다.

▼동맹없는 대북 화해정책 한계▼

그런데 우리의 외교는 어떠한가. 작금의 국제 정세와 역학관계의 변화에 일관성 있는 대응을 하고 있는가. 걱정스럽게도 우리 외교는 집중하고 있지 못하다. 외교는 국내적 이념 대결과 대중적 감정에 휘둘리고 있다. 외교정책은 자율성과 전문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정치적 리더십은 이니셔티브를 상실했다.

새 정부는 지금의 위기를 직시해야 한다. 국제 정치는 명분과 법보다는 실리와 힘의 지배를 받는 세계다. 우리의 이념과 선호와는 관계없이 작동되는 냉혹한 세계다. 국제 정치가 여전히 주권국가체계로 구성되어 있는 한, 국가안전보장은 최고 과제다. 국가의 안전은 자위력과 동맹관계로 보장된다. 이것이 국제정치다.

북한핵 문제의 해법과 한미 관계의 새 틀 짜기에 대해서는 이념과 접근 방법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논쟁은 당연하고 또한 바람직하다. 대북 화해정책 또한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자위력과 동맹이 전제되지 않는 대북 화해정책은 유화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칫 목적과 수단의 전이를 초래할 수도 있다.

작금의 외교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당선자는 다음과 같은 노력을 서둘러야 한다.

첫째, 새 정부는 한미 동맹의 필요성과 이익을 국민에게 구체적으로 설득하고 홍보해야 한다. 이제는 ‘한미 혈맹’이라는 감상적 구호만으로 국민은 설득되지 않는다. 수지타산의 계산을 보여주고 합리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한미 동맹은 안전보장의 큰 틀이다. 노 당선자가 말하는 “미국에 대해서도 할 말은 하겠다”는 소신은 평가할 만하고 또 필요한 덕목이다. 맹목적인 대미 추종이나 터부화는 오히려 반미 감정을 증폭시키고 결과적으로 한미 관계를 어렵게 만든다. 미군 장갑차 여중생 치사사건에 대한 정부의 소극적이고 느린 대응이 초래했던 결과를 교훈삼아야 한다. 하지만 대미 소신은 대미 대결이 아니라 한미관계를 성숙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해야 한다.

둘째, 새 정부는 한미 동맹이 남북관계의 종속변수가 아님을 대외적으로 명확히 천명해야 한다. 남북관계 개선이 한미동맹을 곧바로 대체하지는 않는다. 한미동맹은 한반도 평화 정착 과정만이 아니라 통일 과정과 통일 이후의 역학관계까지도 시야에 넣고 계산해야 하는 중장기 독립변수다. 탈냉전과 한반도 평화정착 과정에 맞추어 한미동맹의 틀을 새롭게 짜고자 하는 필요성은 절실하다. 하지만 한미동맹의 새 틀 짜기는 국가 장기전략의 문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새 정부는 신속히 국내외의 우려와 불안감을 해소시켜야 한다. 국민을 안심시키고 해외 투자자와 동맹국의 우려를 해소시켜야 한다. 시장은 보수적이고 깨어지기 쉽다.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 직시를▼

노 당선자는 서둘러 외교와 국방에 관한 인선을 마무리해야 한다. 정책 결정의 공백과 혼선의 해소가 하루라도 아쉬운 시기다. 그리고 무엇보다 외교와 국방이 국내 정치와 이념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노 당선자는 외교와 국방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확보해 주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통령 선거 공약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다. 국가 이익과 안전보장에 도움이 된다면 차라리 선거공약의 불이행이 왜 불가피한지를 국민에게 설득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도 필요하다.

어느 때보다 대통령의 용기 있는 리더십과 현실주의적 국제 정치관이 절실한 시점이다.

양기웅 한림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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