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강압수사 언제까지…

  • 입력 2002년 11월 3일 19시 26분


《그동안 ‘인권수호기관’을 자처해온 검찰이 하루아침에 ‘인권침해기관’으로 전락했다. 검사들 가운데는 억울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시민단체와 변호사, 판사들은 “이번에 발생한 ‘피의자 폭행 사망사건’은 검찰 수사의 구조적 하자(瑕疵)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라며 임기응변이 아닌 종합처방을 요구하고 있다. 검찰의 강압수사 실태와 문제점, 개선 방안 등을 집중 조명한다.》

서울지검에서 발생한 ‘피의자 폭행 사망사건’은 우연한 실수일까, 아니면 예고된 사고일까.

서울지검의 대다수 일선 검사들은 “살인사건을 해결하려는 의욕이 넘치다 보니 발생한 단순 실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형사사건을 취급하면서 검찰을 출입해본 변호사들과 일부 검사들은 “어느 검사가 피의자 폭행사건의 당사자가 되느냐의 문제였을 뿐 이번 사건은 예견된 사고”라고 입을 모은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가혹수사 관행을 뿌리뽑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예고된 사고〓수사관에 의한 피의자 폭행 실상이 이번에 드러났지만 그동안 유사한 일이 계속되어 오고 있었다는 것이 변호사와 판사, 일부 검사들의 주장이다.

먼저 경찰 쪽은 1999년 6월 수사권 독립을 요구하면서 수면위로 떠오른 강압수사 문제로 검찰과 갈등을 빚자 피의자를 신문하는 순간부터 변호인 입회를 허용해 강압수사가 거의 없어졌다는 것. 따라서 최근의 강압 수사는 사회적 통념과는 달리 오히려 검찰 쪽에서 더 많다는 것.

이 같은 강압수사는 인지수사를 주로 하는 특수부와 강력부, 마약부에서 일어나곤 한다고 일부 검사들은 말한다. 특히 조직폭력배와 마약사범 등을 다루는 검찰의 강력부와 마약부는 피의자가 사회 지도층인 특수부보다 강압수사의 유혹을 받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

사실 검찰 주변에서는 조천훈씨 사망 사건에서 드러난 무차별 구타와 ‘잠 안 재우기’ 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던 게 사실이다.

서울지검이 2000년 7월 이후 체포 전문가인 현직 무술 경관을 15명이나 검찰 수사관으로 채용한 것도 이번 사고를 부채질했다. 체포 전문가인 무술경관들은 강력범 검거과정에서뿐만 아니라 수사과정에서도 위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자백을 이끌어내는 등의 ‘악역’을 맡아왔다. 이 때문에 이들을 포함한 수사관들의 구타는 그 정도가 심하지 않을 경우 사실상 묵인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도 숨기는 검찰의 가혹 행위〓검찰의 가혹 행위는 외부로 드러나는 게 쉽지 않다. 피의자가 가혹 행위를 당했다고 해도 검찰이 기소 단계에서 어떤 처분을 내릴지, 또 재판 과정에서 구형량을 얼마로 정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기 때문.

최근 재판을 받고 있던 전직 구청장이 검찰 수사관들로부터 폭행을 당했다고 국내의 한 인권 단체에 호소했지만 인권 단체가 정식으로 항의하자고 제안하자 발길을 돌렸다.

설령 피해자가 수사 기관의 직원을 고소해도 검찰로부터 피해 사실을 인정받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2000년 검찰 경찰 국정원 직원 등 수사 기관 직원들의 독직폭행 및 가혹행위, 직권남용, 불법체포에 대한 고소고발이 849건 접수됐으나 검찰은 7건만 기소하고 420건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지난해 상반기에는 같은 이유로 511건이 접수됐으나 1건 기소에 그쳤다.

수사 기관의 가혹 행위에 대해 검찰이 불기소 처분을 내렸을 경우 고소고발자가 법원에 요청하는 재정신청이 계속 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외국 사례와 대책〓우리나라는 수사 기관의 가혹 행위를 법률(형법, 형사소송법 등)로 전면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금지규정은 선언적인 것일 뿐이다. 가혹 행위를 방지할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되지 않아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재야법조계나 학계의 전문가들이 가혹 행위 방지를 위한 법률을 따로 제정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영국의 경우 구체적인 증거수집 절차를 법률로 정하고 수사 과정을 엄격하고도 구체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예를 들어 피의자를 2시간 신문하면 반드시 10분간 휴식시간을 주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변호인 접견을 허용하지 않는 등 법에 정해진 절차를 지키지 않을 경우 수사기관의 신문조서에 대한 증거 능력을 아예 인정하지 않도록 법률로 규정해놓고 있다.

일본의 경우엔 피의자의 얼굴을 몇 대만 때려도 검사가 형사처벌되고 지휘라인이 사표를 내는 것이 관례.

박찬운(朴燦運) 변호사는 “검찰의 가혹 행위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점이 드러난 만큼 이번 사건은 강압수사를 배제하면서 어떻게 피의자 혐의에 대한 증거를 수집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처방을 마련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하종대기자 orionha@donga.com

정위용기자 viyonz@donga.com

▼왜 강압수사 유혹에 빠지나▼

‘사건은 손안에 쥔 계란.’

한 검사는 ‘피의자 사망사건’의 여파에 따른 수사 현장의 고충을 이렇게 표현했다.

손에 너무 힘을 주면 손안에서 계란이 깨지고, 힘을 풀면 계란이 땅에 떨어져 깨지듯 강압수사도 문제지만 피의자를 부드럽게 다루기만 해서는 수사가 진전을 보지 못할 게 뻔하지 않느냐는 설명이다.

따라서 깨지지 않을 정도의 힘을 유지하면서 수사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데 그렇게 ‘힘 조절’을 하기가 어지간한 베테랑이 아니고서는 쉽지 않다.

한 검찰 수사관은 “전과가 많은 살인사건 용의자나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잡범들의 경우 불가피하게 강압적인 방법을 써서 자백을 받아내곤 한다”고 실토했다.

명백한 물증은 없지만 정황을 따져 봤을 때 심증을 굳힐 수 있는 경우가 꽤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혐의를 확정짓기 위해 때로는 강압수사의 유혹에 빠진다는 게 수사현장의 공통된 목소리다.

폭언 폭행을 하지 않고 수사하는 방법 가운데 혐의와 무관한 다른 약점을 캐내 협박을 해 자백을 받아내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도 넓은 의미의 강압수사에 해당한다고 법조인들은 지적한다.

따라서 이번 사건을 계기로 ‘진실발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적법절차’를 지키는 것이라는 점을 검찰이 깨달아야 한다고 관계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검찰 고위관계자도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고 우리 모두가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증거 위주의 수사가 돼야 하고 수사력도 그런 방향으로 집중돼야 한다는 것. 하지만 수사 인력과 장비, 수사비의 현실화 등 열악한 수사여건의 개선도 동시에 이뤄져야 과학수사로의 대전환이 이뤄질 수 있다고 일선 검사들은 말한다.

이명건기자 gun43@donga.com

▼강압수사 자백 증거능력 있나▼

강압수사로 얻어낸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다.

최고법인 헌법에는 ‘고문을 받지 아니할 권리’와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권리’를 기본권의 하나로 보장하고 있다. 또 형사소송법(제309조)은 ‘피고인의 자백이 고문·폭행·협박·신체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또는 기타 방법으로 임의 진술한 것이 아니라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는 때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하지 못한다’고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법만으로는 강압수사가 근절될 수 없다. 오래 전부터 ‘증거의 여왕’으로 통해온 자백은 강압수사를 통해 가장 쉽게 받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과거 법원은 피고인이 법정에서 고문 등에 의한 자백이라고 주장하더라도 검찰이 작성한 조서내용의 신빙성(증명능력) 여부만을 따졌다. 이 자백의 증거능력에 대해선 검찰조서를 묵시적으로 인정해 왔던 것.

그러나 최근 들어 법원은 구타 등 강압수사를 통해 받아낸 자백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 판례를 차츰 확립해가고 있다. 1997년 대법원은 특경가법상 알선수재로 기소된 은행원 문학서씨 사건에서 잠을 재우지 않은 상태에서 받아낸 진술은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결한 바 있고, 1995년 부산 만덕초등학교 강주영양 유괴살인 사건의 경우 피고인의 진술을 ‘강압수사에 의한 허위자백’이라고 인정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와 관련, 검찰은 허위 자백을 받아낸 경찰관 3명을 독직폭행 혐의로 기소하기도 했다.

이영희(李英姬) 변호사는 “법원이 이 같은 판례를 확고히 정립해 수사기관이 ‘자백 받아내기’ 위주의 수사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길진균기자 l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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