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송호근/신의주, ´여의주´ 될까

  • 입력 2002년 9월 24일 18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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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드디어 사활을 건 모험을 시작했다. 19일 발표된 ‘신의주 경제특구안’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른바 ‘상하이(上海) 구상’의 결과이지만, 세계화의 엄청난 공세에 시달리고 있는 세계 유일의 ‘이데올로기 아일랜드’가 선택한 최후의 생존전략이다. 세계 언론들도 평양 당국의 후속 조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이 공격적 안보전략의 대상국가로 북한을 지목한 직후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외교란 일종의 시간차 게임이기에 김정일 위원장의 노련한 수완을 잊지 않는 전략전문가들은 미국의 강공을 일단 모면해보자는 속셈쯤으로 해석할지 모른다. 그런 의도도 다분히 읽혀지기는 하지만, ‘자본은 곧 사회구성체’임을 환히 알고 있는 북한이 무적함대인 시장경제를 집안으로 끌어들일 때에는 절박한 속사정을 헤아려 주는 것도 좋을 법하다.

▼홍콩보다 마카오식 개발 적합▼

외교에도 단수가 있다면 공산국가 리더들은 외교의 고수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후처리 문제를 둘러싼 연합국 협상에서 처칠과 트루먼은 스탈린의 외교술에 현혹되어 많은 전리품을 넘겨주었다. 한반도 분할점령이 대표적인 결과다. 핵사찰과 미사일문제가 불거져 나올 때마다 평양은 항상 고지를 점했다. 포커게임에 비유한다면 별 볼일 없는 패로 판돈을 걷어갔으니 말이다. 영변에 몇 번 파견된 국제전문가들도 북한의 핵무기 생산능력을 정확히 가늠하지 못했다. 당시 평양 당국은 축구공만 한 핵폭탄을 갖고 있음을 은근히 암시했는데, 사실은 탁구공 정도였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평양은 낮은 패로 버티기 끝에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얻었다. 햇볕정책에서, 그리고 이번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의 대련(對鍊)에서도 평양은 가진 것 없이 득의만면했다. 그런데 다시 ‘악의 축’으로 지목된 이번만큼은 사정이 다른 듯하다. 첨단무기와 강경보수 이념으로 무장한 람보식 공격에는 독일 지식인들도 손을 들었을 정도다.

그런데 필자는 이런 시각으로 사태를 바라보고 싶지 않다. 시장경제가 세계를 뒤덮는 판에 홀로 살아남는 방법이 궁색해진 북한 내부의 절박성에 초점을 맞추고 싶은 것이다. 신의주특구안은 권력층 내부에서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자칫하면 동독 꼴이 날지 모른다는 신중론과, 그래도 실험이 필요하다는 개방·모험론이 맞붙어 결국 ‘일국양제(一國兩制)’식 분리안으로 낙착되었을 것이다.

결정 배경에는 동독과 북한의 차이점이 작용했으리라 생각된다. 동독과는 달리 북한은 지정학적으로 ‘섬’이다. 4㎞에 이르는 비무장지대(DMZ)는 뛰어넘을 수 있는 베를린 장벽과는 다르며, 시민집단간 커뮤니케이션이 정치체제를 와해시킬 염려도 별로 없다. 투자유치를 위해 50년간 조차를 허용하겠다는 발상 속에는 적어도 신의주가 체제붕괴를 낳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엿보인다. 마침 경의선과 동해선 연결사업이 확정된 마당에 한국·일본과 중국·러시아를 잇는 물류기지 또는 무역자유지구를 내다보았을 것이다. 남한에 그것은 비단길을 완성하는 결절점이고, 북한에는 생존의 탯줄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장관에 임명된 양빈(楊斌)이 홍콩식 자본주의를 거론했지만, 신의주에 적합한 모델은 홍콩보다는 마카오다. 홍콩 신화는 영국의 경영정신과 중국인의 상술이 결합한 결과다. 정치체제는 백년 동안 사전에 결정된 상황에서 중국인이 할 일은 훌륭한 장사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마카오 역시 이런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포르투갈의 지원보다는 훨씬 더 중국인의 땀이 배어 있다. 인구가 44만명으로 신의주와 비슷하고 지경학적 위치와 크기도 공통점이 많다. 마카오는 금융자본의 서식지가 아니고 오히려 경공업의 하청기지이자 물류기지다. 중국 본토의 광둥과 후지안이 시장배후지였는데 지금은 세계를 상대로 한 무역항이 되었다.

▼노동-외자 결합 여부가 관건▼

그런데 중국과 러시아를 향한 서진항로(西進航路)의 베이스캠프를 자처한 신의주는 외국자본에 어떤 매력을 제공할 것인가. 사상이 투철한 노동력과 외국자본이 제대로 결합할 것인가. 마카오의 중국인들처럼 임금노동과 사업에 열을 올리게끔 허용될 것인가. 마카오에는 하루 2만명이 페리호로, 5만명이 국경을 넘어 출근한다. 공항출입자를 합하면 이 작은 도시를 들락거리는 연인원은 2500만명에 이른다. 시장경제의 사회적 조건으로서의 이 잦은 출입은 폐쇄회로를 결국 부순다. 그래서 경제특구는 급기야 ‘사상(思想)특구’가 될 터인데, 북한은 이것까지도 포용하겠다는 것인가.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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