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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8월 20일 19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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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취하고 있는 일련의 경제정책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인플레이션을 통해 경제를 안정화시킨다는 다소 역설적인 프로그램이다. 인플레이션이라면 경제 위기나 불안을 떠올리는 우리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든 논리이지만, 수십년간 변하지 않는 고정가격 때문에 갖가지 부작용을 경험해 온 사회주의체제에서는 낯설지만은 않은 주장이다. 특히 1980년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채택했던 ‘계획계량경제’는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모델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동유럽의 계획계량형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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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가 공급의 부족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저가의 국정 가격으로 인한 낭비의 결과이기도 하다고 보기 시작했다. 가격시스템의 문제점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규모의 인플레이션은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남은 문제는 그 같은 가격현실화 작업을 시장에 맡길 것인가, 아니면 국가가 담당할 것인가 하는 방법론에 있었다.
후자가 가능하다고 주창한 계획계량형 사회주의체제는 수십년간 불변인 국정 가격과 실제 시장가격의 격차를 측정하는 지표를 개발했다. 억눌려 온 인플레이션을 가격으로 환산하는 방정식을 만들어, 국가가 직접 수요-공급을 계산해 수시로 변하는 국정가격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1940년대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오스카 랑게가 시도한 계획(planning)과 계량경제학(Econometrics)의 이론적 접목을 현실화한 야심찬 포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계량경제학의 전제가 되는 정확한 정보의 집적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들의 가격시스템은 여전히 경직되어 있었다. 이미 상당부분 진행됐던 사적 소유의 확대와 특권화한 중간관료(노멘클라투라)의 비협조가 정보에 대한 국가통제력의 상실을 불렀고 결국 급속한 자본주의화를 막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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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의 실패와 10년간의 구조조정?▼
1992년 북한은 쌀을 제외한 물가와 임금을 인상하는 등 계획계량형 경제모델을 연상시키는 실험을 했다. 그러나 참담한 실패였다. 그로부터 10년 뒤 김정일 체제는 유사한 실험을 단행하고 있다. 다른 점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농업, 공업 생산단위에 대한 구조조정이 병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협동농장의 국영화 작업이다. 1998년부터 시작된 토지정리사업과 함께 ‘토지사용료’의 징수로 드러나는 이 작업은 경지의 90%를 차지하는 협동농장의 국영화를 가속화하는 것이다. 조만간 북한의 농촌 구조는 국가가 임금제 농업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업연합기업소 형태가 중심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이 점에서 북한의 개혁은 사적 소유 부문을 통제하지 못했던 동유럽의 개혁과는 분명 다른 방향성을 띠고 있다. 의도적으로 토지에 대해 가족단위의 사적 소유를 확산해 간 중국과는 출발점부터 다르다.
다음으로 연합기업소의 재편이다. 당이 좌우하던 지역단위의 복합기업형태를 해체하고, 부문별 편제를 통한 산업 조직의 재편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지역 단위로 고착되어 전권을 휘둘러 온 당 관료 등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지방기업으로의 분권화를 추진한 것이다. 즉 중간관료의 권력을 위아래로 분산시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구조조정은 생산과 정보에 대한 국가통제력의 회복을 동반하는 조치라는 점에서 동유럽형 모델의 취약점을 보완하겠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 분명하다. 김정일이 최근 들어 ‘정보화’를 부쩍 강조하고 있는 점 역시 정보기술(IT)산업 발전을 토대로 한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중간단위 권력을 거치지 않고 하부 생산단위와 중앙정부를 직접 연결함으로써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하겠다는 포석의 일환으로 보인다.
▼'계산제' '책임제' 사회주의?▼
북한 사회과학원이 발행하는 잡지인 ‘경제연구’에서는 최근 계산제와 책임제라는 단어를 부쩍 강조해 왔다. 책임제라는 단어가 기업의 독립채산제에 따른 노동인센티브의 강화를 의미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북한은 이미 ‘건달꾼’과 ‘놀고 먹는 자’들을 비판하기 시작했고, 기업원가 계산에서의 각종 왜곡을 시정해 왔기 때문이다. 중공업 기업에만 유리했던 도매가격 시스템이 수정되었고, 노동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했던 임금 시스템이 변했다. 이젠 국가재정에서 임금을 주는 계획화 체제가 아니라 기업의 채산 실적에 따라 임금이 등락하는 체제로 전환했다. 책임제의 실체인 것이다.
그러나 계산제라는 단어가 계획계량형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은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쌀값의 천문학적인 인플레를 포함해 성역 없는 가격 정상화 조치를 취하면서도 여전히 국가가 가격책정권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한다면, 이 체제는 북한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국가가 수요-공급을 직접 계산해 가격을 제시하는 계획계량형 사회주의체제의 운영과정과 유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작지만 중요한 변화!▼
새로운 경제정책들을 단순히 사경제 부문을 공격해 계획경제를 정상화하고 국가의 통제력을 회복하기 위한 일회용 조치라고 보기에는 북한경제 전체의 구조와 운영원리의 변화 폭은 이처럼 생각보다 깊다. 물론 이번 조치는 시장경제로의 체제전환과 같은 거대한 변화는 아니다. 그러나 이 체제가 스탈린식 현물 사회주의와는 달리 화폐와 가격의 기능을 복권시키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그 성패와는 상관없이 이는 시장경제 원리와 높은 호환성을 지닌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세계체제와 교류할 코드를 맞추겠다는 이 같은 신호를 우리가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조동호 KDI 북한경제팀장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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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북한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경제의 회생이다. 지난 수년간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대의 국가적 슬로건으로 등장하고 있는 ‘강성대국 건설’도 정치, 군사, 사상의 강국은 이뤘으므로 경제만 일으켜 세우면 된다는 주장이다.
계획경제이건 시장경제이건 경제회생은 자본과 노동 같은 생산요소의 투입증가가 있어야 가능하다. 1990년대 북한의 경제난은 사회주의 시장의 붕괴에 따른 자본유입의 감소가 근본적 원인이다. 자본의 감소는 생산의 부족으로 이어져 공식부문의 계획을 어렵게 한다. 그 결과 비공식 부문이 성행하게 되고, 자본과 노동은 비공식 부문으로 빠져나가 국가의 경제는 더욱 어렵게 된다.
이번 북한의 경제조치는 가격과 임금의 인상을 통해 비공식 부문에서 움직이던 자본과 노동을 공식 부문으로 끌어들여 경제회생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의도다. 동시에 인센티브의 확대를 통해 생산의욕을 고취시켜 추가적인 생산증가를 이루겠다는 목적이다.
이런 조치를 계획계량형 사회주의로의 전환으로만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 비공식 부문이 지나치게 확대돼 계획수립 자체가 곤란한 상황에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계획수립의 효율화가 아니라 공식부문의 정상화다. 최근 북한이 암시장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물론 이번 변화가 시장경제를 향한 것이 아니라 계획계량형, 혹은 위로부터의 계획 하달에 기초한 지령형으로부터 생산 하부단위의 자율성을 제고하는 유도형 계획경제 체제로의 수정이라는 것은 타당한 지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근본적 이유가 공식 부문의 정상화에 있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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