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평화재단 한미포럼]"부시 대화제의는 북의 기회"

  • 입력 2002년 2월 20일 18시 49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이후 난기류에 휩싸였던 한반도 주변정세는 20일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한미정상회담을 계기로 일단 진정 국면에 접어든 분위기다.

그러나 이번 정상회담에서 재확인된 대북정책에 대한 한미 간의 인식차는 아직 갈 길이 멀고 험하다는 것을 일깨워줬다. 이날 부시 대통령의 톤은 높지 않았지만, 북한 지도부에 대한 그의 인식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동아일보와 21세기평화재단(이사장 권오기·權五琦 전 통일부총리)은 한미 정상회담의 성과를 평가하고 향후 대북정책에 대한 한미 공조 방안과 우리 정부의 대응책 등을 모색하기 위해 ‘한미포럼’을 개최했다. 동아일보 광화문사옥에서 열린 포럼에서는 송영대(宋榮大) 전 통일원 차관과 정종욱(鄭鍾旭) 아주대 교수가 참석해 대담을 가졌다.

동아일보 부설 21세기평화재단·평화연구소(설립자 김병관·金炳琯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는 각종 학술 문화사업과 민간교류 등을 통해 한반도의 화합과 번영을 촉진하고 세계평화와 인류의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2000년 4월 창립된 공익재단이다.》

▽정종욱 교수〓부시 대통령의 이번 방한은 한미 양국 관계에 대단히 유익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불거져 나온 한미간 갈등과 긴장이 이번 방문을 계기로 봉합되고 북한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대화 우선의 방향으로 두 정상이 합의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우려스러운 부분이 없는 게 아닙니다. 두 정상이 확대회담을 취소해 가면서 2시간 가까이 단독회담을 한 것은 북한문제에 대한 인식에 여전히 차이가 있었지 않았느냐는 추측을 낳는 대목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부시 대통령의 방한은 ‘새로운 시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송영대 전 차관〓부시 대통령의 방한기간 중의 발언은 ‘악의 축’ 국가들에 대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겠다고 한 기존 발언과는 다소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대화’와 ‘제재’라는 두 개의 카드 중 일단 대화 쪽에 무게를 실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회담 결과에는 내면적으로 불씨가 잠재돼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김정일(金正日) 정권에 대한 여전한 불신감을 명백히 드러냈습니다. 특히 북한정권의 주민 억압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입각한 것이라고까지 말한 것은 추호도 대북관을 바꾸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정 교수〓정상회담에서 논의된 의제를 살펴보면 한미 동맹관계, 대테러 전쟁 협력, 대량살상무기(WMD) 해결, 대북 포용정책 등입니다. 회담 후 두 정상은 한미동맹이 동북아 안보에 긴요하고 정치 경제 외교 등 ‘포괄적 동반자’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는 데 만족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음미해봐야 할 대목입니다. 한미동맹이나 안보협력 관계의 성격이 이번 부시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미묘하게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 거죠. 실제 한미동맹이 세계 차원의 대테러 협력을 축으로 할 경우 한반도 안정과 평화와 남북관계는 자칫 종속적인 지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 대량살상무기 해소의 긴박성에 두 정상이 합의하고 이를 대화로 풀겠다는 의지를 밝혔지만 구체적인 해법 마련은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부시 대통령이 우리의 대북 포용정책 지지 의사를 표명한 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걱정스러운 대목이 없지 않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포용정책의 성과가 없었다는 점에 대해 실망을 표시했고 이산가족 재회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소원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까지 했습니다.

▽송 전 차관〓부시 대통령은 햇볕정책을 지지하지만 북한이 이를 수용하지 않아 실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부시 대통령의 참모들이 주장해온 ‘햇볕정책을 지지하지만 환상은 갖고 있지 않다’는 말을 되풀이한 거죠. 이는 앞으로 대북정책 추진 과정에서 다시 이견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중요한 것은 대북관의 문제가 아닌가 봅니다. 김 대통령은 그동안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 대해 식견과 결단력을 갖춘 지도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지난해 3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에 대해 ‘회의감’을 표시한 뒤 ‘악의 축’ 발언에 이어 북한을 ‘국민을 굶기면서 대량살상무기를 확산시키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김정일 정권을 ‘자유를 억압하는 정권’으로 규정했습니다. 또 한가지 주목할 부분이 부시 대통령이 북한 정권과 주민을 분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북한 주민은 도와줘야 할 대상이지만 자유를 억압하는 북한 정권에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 교수〓앞으로 북한이 당장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 것으로 봅니다. 내부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고 씹어볼 게 많을 겁니다. 군부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는 데다 올해 여러 가지 정치적 행사도 준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북한은 빌 클린턴 행정부 말기에 비해 미국의 태도가 대단히 후퇴했고 이번 회담에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볼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은 걸리겠지만 대화에 응해올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생각합니다. 대화에 응해온다면 세 가지 경우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 첫째, 조건부 대화제의입니다. 체면 문제도 걸려 있는 만큼 군사적 위협을 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북-미간 대화채널 격상 등의 요구를 붙여 대화에 나설 가능성이 있습니다. 두 번째론 북한이 기존에 뉴욕에서 진행돼 온 실무차원의 탐색을 계속할 가능성입니다. 미국이 북한에 내놓을 수 있는 ‘당근’이 뭔지를 알아보자는 거죠. 세 번째로 남북대화를 북-미대화의 보조축으로 간주해 북-미대화를 중시할 가능성입니다. 아무튼 앞으로 북-미간에 군사적인 긴장과 갈등이 높아지지 않겠느냐는 시각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부시 대통령도 이번에 북한 주민에 대한 식량지원 등 인도적 차원의 지원은 계속하겠다고 밝힌 것을 보면 북-미관계가 폭발직전의 뇌관상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송 전 차관〓이번 기회가 북한에게는 위기인 동시에 기회라고 봅니다. 북한이 만약 대화를 받아들이고 건설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많은 혜택이 갈 것이고 체제 유지에도 많은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마저 북한이 대화를 거부하면 북한에는 큰 재앙이 닥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공은 북한에 넘어갔습니다. 북한은 외형적으론 강경한 반응을 보이겠지만 내면적으로는 협상에 호응해 오리라고 봅니다. 최근 박길연(朴吉淵) 유엔주재 북한대사가 ‘악의 축’ 발언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한 것도 그런 맥락이죠. 김정일은 사실상 겁을 먹고 있는 것 같습니다. 93년 한반도 핵위기 때 빌 클린턴 정부의 강경대응에 핵확산금지협약(NPT)을 탈퇴하는 ‘벼랑끝 전술’로 맞섰던 것과는 다른 자세입니다. 문제는 협상이 열려도 결렬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북한이 협상을 포기하고 미국과 전쟁을 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시간끌기밖에 없습니다. 북한이 북-미 협상과정에서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대포동 2호’를 실험발사하는 등의 상황도 가정할 수 있지만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벼랑끝 전술’을 다시 쓸 경우 미국의 물리적 대응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협상방식은 직설적이고 실용적인 스타일입니다. 의제를 내놓고 ‘예스’냐, ‘노’냐 결판을 짓자고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정기간 협상하고 성과가 없을 경우 제재 카드, 즉 대북경수로 중단, 외교적 제재, 경제 봉쇄, 군사적 제재 등의 수단을 쓸 수도 있고 군사적 제재 중엔 미사일을 싣고 가는 북한 선박을 공중에서 파괴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정 교수〓북-미대화와 관련해 물론 의미있는 진전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북-미대화의 필요성 또한 상당히 많은 게 사실입니다. 북한이 2003년까지로 정한 미사일 실험발사 유예 시점이 다가오고 있고 핵 특별사찰 수용 여부도 곧 결정해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미국은 핵사찰 문제가 앞으로 1, 2년 내에 타결되지 않으면 경수로 건설을 중단한다는 방침이어서 긴장상태가 재발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우리 정부가 대량살상무기와 재래식 무기 문제를 대화로 풀도록 북측을 설득하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특히 과거 북한의 태도를 보면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92년 발효된 남북 기본합의서에 대량살상무기 및 공격 능력의 제거를 위해 단계적으로 위협을 제거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북한과 얘기할 근거는 충분히 있지만 북측이 응해올 것인지가 의문스러운 거죠.

▽송 전 차관〓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협상으로 유인하기 위해 사전에 선물을 주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도 상호주의에 따라 북한이 협상에 응해 진전이 가시화되면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작년 6월 부시 대통령이 내놓은 방안에는 테러지원국 제외, 관계 개선 등이 포함돼 있었는데 최근 부시 행정부는 주로 경제협력 한가지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소한 것이지만 북한으로선 주의 깊게 무엇을 받을 수 있을지 치밀하게 계산할 것입니다. 또 한미 두 나라가 대량살상무기 억제를 위해 공조하기로 했는데 역할분담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무래도 대량살상무기는 미국이 주역을, 한국이 보조역을 맡고 재래식 무기는 한국이 주역을, 미국이 보조하는 역할 분담을 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정 교수〓결론적으로 이번 회담에서 한국 정부가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 적극 협력하기 위해 한미동맹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은 동맹의 축이 대테러 쪽으로 옮겨졌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북 포용정책이 설 땅이 과거보다 더 좁아진 것 같습니다. 햇볕정책은 대단히 역사적이고 근본취지에 있어 대단히 긍정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햇볕정책을 마무리할 단계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이제는 햇볕정책이 설 수 있는 입지가 국내외적으로 더욱 위축되고 있는 만큼 우리 정부가 그동안의 성과를 마무리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이번 양국 정상회담에서 느꼈습니다.

▽송 전 차관〓이번 회담은 한마디로 ‘총론 합의, 각론 이견’의 소지가 있는 회담이었습니다. 각론에서의 이견은 부시 대통령의 대북관에 강성 기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대북정책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부가 진실성을 가져야 합니다. 북한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보는 현실적이고 냉정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북한에 대해 ‘햇볕’뿐만 아니라 ‘바람’도 보내는 선택적 포용정책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억제에 미국과 합의했기 때문에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 목표 가운데 대량살상무기 해결 문제를 남북간 의제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정부는 전통적인 한미공조와 북한과의 민족공조론 중 한미동맹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미국과 북한의 중간에 설 게 아니라 미국과 한 팀이 돼서 대북정책을 수행해야 합니다. 한반도의 평화정착은 북한의 선의(善意)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굳건한 한미동맹에 의해 지켜진다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송영대▼

△1937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통일원 남북대화사무국 상근대표

△통일원 차관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대변인

△현 숙명여대 겸임교수

▼정종욱▼

△1940년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예일대 정치학박사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대통령 외교안보수석비서관

△주중국 대사

△현 아주대 교수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이철희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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