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상봉]병마로 쓰러진 '오마니' 北 큰아들 못만나

  • 입력 2000년 8월 15일 23시 44분


“여보세요… 어?… 어?… 어….”

불과 1분이나 될까. 50년 만에 전화로 아들의 목소리를 들은 노모의 말은 이게 전부였다. 아들 이름도 한번 제대로 불러보지 못한 채.

15일 오후 5시경 서울 마포구 서교동 양한종씨의 집. 김애란할머니(88)는 꿈에도 그리던 큰아들 양한상씨(69)의 사진을 앞에 놓고 아들의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도무지 한마디 말도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끊겼어”라며 힘없이 전화기를 내려놓는 김할머니의 얼굴에선 희미한 떨림만 있을 뿐 아무런 감정의 동요를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김할머니는 긴 한숨을 내쉬며 “뭐라고 하는지 잘 안들렸어. 자꾸 울기만 하고 말을 못해…”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갑자기 격한 감정이 솟구치는 듯 호흡이 빨라졌지만 이내 정신을 수습하고 안정을 찾았다. TV를 통해서나마 아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하지만 이미 침침해진 눈에 아들의 얼굴이 들어올 리 없다.

노환으로 1년 째 자리보전을 해온 형편이지만 김할머니는 이날 오후 내내 힘겹게 TV 앞에 바짝 놓인 소파에 앉았다가 다시 침대에 눕기를 몇차례나 했는지 모른다. 김할머니는 TV를 보며 여러차례 “나도 걸음만 걸을 수 있다면…”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손자 성식씨(32)는 “할머니에게 또다른 아쉬움을 남기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반평생 동안 이제나저제나 만날 날을 고대해왔건만 정작 서울까지 온 가족을 지척에 두고도 보지 못하는 처지는 김할머니만이 아니었다. 황주봉씨(76·충남 천안시)와 안중휘씨(61·서울 강동구 천호동)도 갑작스러운 병마 때문에 북에서 내려온 형제를 만나지 못한 채 TV로, 전화로 50년 만의 만남을 대신해야 했다.

<이철희기자>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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