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 뒤안길 각국 혈육상봉]이산아픔에 애끊는 지구촌

  • 입력 2000년 8월 15일 18시 43분


아시아 중동 유럽 등 지구촌 곳곳에는 남북한 이산가족처럼 이산의 아픔을 안고 사는 가족들이 있다. 중국과 대만, 그리고 분쟁 중이거나 분쟁을 겪은 팔레스타인 코소보 등에 특히 이산가족이 많다. 이들은 헤어진 가족을 백방으로 만날 노력을 하며 지내고 있다.

▽중국과 대만〓양안(兩岸·중국―대만) 사이에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된 것은 1987년부터였다. 그 해 11월 대만 당국은 ‘본토 수복’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인도주의 차원에서 대륙에 있는 친척 방문을 공식 허용했다.

이에 따라 혈연 및 인척관계에 있는 친척들에 한해 매년 1회 본토 방문이 허용했다. 방문기간은 3개월 이내. 다만 군과 경찰 및 국가공무원들의 방문은 허용하지 않았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그 해 11월 한달 동안 무려 1만3000여명이 대륙의 친척을 방문했다고 보도했다.대만 당국의 대륙 친척 방문 허용은 사실상 대륙여행 자유화 조치였다. 이후 지난해말까지 중국을 방문한 대만인은 약 1500만명. 해마다 100만명 이상이 중국을 찾았다.

중국도 공식적으로는 대만 방문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 국무원 대만판공실의 허가가 필요할 뿐이다. 88년부터 지난해말까지 대만을 방문한 중국 본토인은 44만9000여명.

49년 국민당의 패주와 함께 대만으로 건너온 대륙인은 모두 60만명. 이들의 후손을 포함해 현재 대륙에 친인척을 두고 있는 대만 이산가족의 수는 200만∼300만명으로 추정된다.

양안 사이의 이산가족 상봉은 당국자간 협의가 아니라 대만 당국의 일방적인 허용조치로 시작됐다는 점이 우리와는 다르다.

78년 개혁개방을 시작한 중국도 84년 ‘1국 2체제’ 방식에 의한 평화통일 방침을 발표했다. 무력침공에 의한 ‘대만 해방’을 포기하고 양안 화해시대를 연 것. 그로부터 3년 후 이산가족 상봉이 실현됐다.

▽팔레스타인〓올 5월 이스라엘군이 남부 레바논에서 철군한 이후 이스라엘과 레바논 국경에서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눈물의 상봉극이 이어지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52년 만에 헤어진 가족과 상봉하기 시작한 것.

1948년 현재의 이스라엘 영토에 살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이 침공하자 인근 레바논 등 아랍국가로 흩어졌다. 35만명은 레바논의 난민 캠프에 수용됐다. 이들을 포함해 현재 아랍국에 흩어져 사는 팔레스타인인들은 400만명 가량.

팔레스타인인 가운데 이스라엘 땅에 가족과 친지를 두고 있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남부 레바논까지 점령한 뒤 고향에 남은 사람들과 연락이 두절됐다.

마침내 이스라엘군이 남부 레바논에서 철군하면서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나마 이산가족 상봉이 가능하게 된 것. 영국의 BBC방송은 이스라엘 철군 직후 팔레스타인 이산가족의 ‘철조망 상봉’을 보도하면서 “국경을 지키는 이스라엘 군인들도 52년 만의 상봉을 막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코소보〓지난해 5월9일 미국 국민은 코소보판 ‘엄마 찾아 3만리’ 때문에 눈시울을 붉혔다. 코소보에서 혼자 탈출한 열살짜리 알바니아계 소녀 블리나 라시가 뉴욕 케네디 공항에서 9년 만에 부모와 상봉하는 장면이 CNN방송을 통해 중계됐기 때문이다.

블리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부모 품에 뛰어들어 울음을 터뜨렸고, 죽은 줄만 알았던 딸을 안은 부모도 오열했다. 바로 다음날이 미국의 어머니날이어서 미국인들이 느끼는 감동이 더욱 컸다.

블리나는 1990년 부모와 헤어졌다. 반(反) 세르비아 활동을 하다가 지명수배된 아버지가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입국 비자가 나오지 않은 블리나를 어머니에게 맡겼기 때문. 세르비아의 알바니아계 박해가 더욱 심해지면서 블리나와 부모 사이에는 연락이 끊겼다.

지난해 4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코소보 공습이 시작되자 할머니와 함께 피란길에 올랐으나 혼란 속에서 할머니와 헤어지고 말았다. 홀로 남은 블리나는 마케도니아의 한 난민촌에 수용됐다. 그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다. 난민촌의 이산가족센터 주선으로 미국의 부모와 연락이 닿는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해 코소보 공습 이후 인근 마케도니아 등의 난민촌 이산가족센터 앞에는 ‘이산가족의 벽’이 설치됐다. 이 벽에는 80년대 한국의 이산가족찾기 캠페인 때처럼 헤어진 가족과 친지를 찾는 애절한 사연들이 빼곡히 붙었다.

<박제균기자>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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