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명단서 동생이름 확인 임창혁씨 '회한의 눈물'

  • 입력 2000년 7월 16일 23시 17분


“2년 전에만 만날 수 있었더라도….”

정부가 북한의 적십자회가 보내온 8·15 이산가족 방문단 후보자 200명의 명단을 공개한 16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2동 231 자택에서 동생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임창혁(任昌爀·71)씨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못내 아쉬움을 떨치지 못했다.

이제는 거의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하는데다 치매로 병상에 누운 아버지 희경(稀慶·91)씨가 2년전까지만 해도 정정했기 때문이다.

침대에서 겨우 일어난 아버지에게 큰 아들 창혁씨가 유일하게 보관하고 있는 동생의 중학교시절 사진을 보여주며 “아버지, 재혁(在爀·66)이가 돌아온대요”라고 큰 소리로 여러 차례 외쳤지만 희경씨는 눈만 겨우 껌뻑일 뿐이었다.

그래도 창혁씨는 “아버지가 알아들으신 것 같다”며 기쁨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의용군으로 끌려간 재혁씨를 그처럼 보고싶어 하던 어머니 최경희(崔敬姬)씨는 아들을 보지 못한 채 16년전 71세를 일기로 끝내 돌아가셨다. 여동생 부자(富子)씨도 지난해 폐암으로 세상을 떴다.

세월의 더께는 이처럼 1000만 이산가족의 회한을 두텁게 쌓아놓은 것일까. 동생에 대한 창혁씨의 회고는 끝이 없다.

7남매 가운데 셋째인 재혁씨가 의용군으로 끌려간 것은 50년7월 중순경. 6·25가 발발한 지 한 달이 채 못돼서였다. 당시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서 청량중 3년에 재학중이던 재혁씨는 “잠시 외출하겠다”며 나갔다가 길거리에서 인민군의 눈에 띄어 그 자리에서 징발된 것.

뒤늦게 소문을 듣고 창혁씨가 동생이 끌려갔다는 혜화초등학교로 가봤지만 수백명의 학생들이 의용군 입대를 위해 모여 있는 것만 먼발치서 봤을 뿐 교실엔 얼씬도 할 수 없었다.

그 뒤 가족들은 혹시나 했지만 재혁씨는 반세기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소식도 전혀 알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가족들은 7년 만에 행방불명으로 신고했고 이듬해 정부 방침에 따라 호적을 정리했다.

창혁씨는 “가족 모두가 재혁이가 죽은 줄 알아 그동안 이산가족 상봉희망 신청도 내지 않았다”며 “‘죽었던 재혁이’가 오면 동네 잔치라도 해야겠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종대·이현두기자>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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