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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12월 29일 20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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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말은 부드럽기보다는 거칠었고 풍자와 재치로 번뜩이기 보다는 직설적이고 노골적이었다. 상대의 말을 한숨 쉬었다가 받아치는 여유도 넉넉함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가파르고 숨찬 말만 난무했다.
여당의 한 국회의원은 야당의 한 여성의원에게 “싸가지 없는 ×”이라는 욕설을 퍼부었
말은 자주 위선의 탈을 쓰고 전해졌다. ‘옷사건’의 네여인은 하나같이 성경에 손을 얹고 진실을 맹세했지만 토해낸 말들은 진실과 거리가 멀었다. 말그대로 ‘성경 수난’ 시대였다.지난 한 세기를 되돌아보면서 저마다 쏟아낸 ‘소회의 말’도 사회상과 무관할 수 없었다.
한 재벌오너는 “이제는 뜬 구름이 된 제 여생동안 모든 것을 면류관 삼아 온몸으로 아프게 느끼며 살아갈 것”이라는 통한(痛恨)의 말로 실패로 끝난 삶을 마무리했다.
지난 한해 우리사회의 ‘자화상’을 말의 거울을 통해 되돌아 본다.》
▼정치▼
▽고 제정구의원은 김대중대통령에게 억압받다가 속이 터져 얻은 ‘DJ암’ 때문에 돌아갔다(한나라당 이부영원내총무, 3월11일 시흥 보선 지구당 임시대회에서).
▽생선반찬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해양수산부에 관심이 많았다(정상천해양수산부장관, 3월24일 TV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책임이 있으면 처리하겠다. 그러나 잘못이 없는데 마녀사냥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김대중대통령, 6월1일 기자회견에서 옷로비의혹사건과 관련해 당시 김태정법무부장관을 두둔하면서).
▽독재자는 언제나 얼굴이나 눈을 못쓰게 만드는 습성이 있다(김영삼 전대통령, 6월3일 페인트 테러를 당한 뒤 기자회견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한다(연정희 배정숙씨, 8월23일 옷로비 청문회에서).
▽양주만 마시면 독하니까 맥주와 섞어 먹었다(진형구 전대검공안부장, 8월27일 파업유도 청문회에서).
▽병신같이 앉아만 있으란 말이냐(엄대우전국립공원관리공단이사장, 9월28일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이 답변자세를 나무라자).
▽빨치산이 아니면 됐지, 뭘 그러나(한나라당 이회창총재, 11월6일 기자간담회에서 정형근의원이 김대중정부의 대야당전략이 빨치산식이라고 공격한 데 대해 국민회의측이 항의, 반발하자).
▽아직도 JP의 말을 믿는 국민이 있나(자민련 김용환전수석부총재, 11월29일 기자들과의 전화통화에서).
▽정치 10단 11단들이 하는 일이라 뭐가 뭔지 모르겠다(자민련 박태준총재, 12월17일 DJP의 합당논의에 대해).
▽김대중대통령이 97년 대선때 중앙일보 홍석현회장으로부터 삼성의 정치자금을 전달받았다고 한다. 정형근의원이 워낙 국가정보원을 공격해 초기에 일부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쫓아다녔다(천용택국가정보원장, 12월15일 검찰출입 기자들과의 오찬에서 ‘국정원 직원들이 정형근의원을 미행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자발적으로’ 쫓아다닌 것이라고 해명).
▼경제▼
▽코닥스의 껌통텔 100주만 사주세요(한 초보 주식투자자, 12월 “코스닥 ‘컴통텔’ 아니면 주식 아니다?”라는 신문기사 제목을 잘못 기억한 채 증권사 객장에서 매입주문을 내면서).
▽앞으로 주가는 1∼2년간 상승세를 탈 것이 분명하다. 주가는 골고루 올라가지 않는다. 선도주와 소외주가 나타날 것이다. 선도주는 신기술업종에 속하는 종목들인데 문제는 개인들이 신기술을 잘 모른다는 점이다(강봉균 재정경제부 장관, 12월27일 향후 주가전망과 관련해).
▽11월 금융대란은 들판에 텐트 쳐놓고 기다리는 휴거보다 일어나기가 더 어렵다(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 10월 중순 금융대란설은 ‘설’로 그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이제는 뜬구름이 된 제 여생 동안 모든 것을 가시 면류관삼아 온몸으로 아프게 느끼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김우중 전대우회장, 11월말 임직원에게 보내는 고별편지에서).
▽참여연대는 ‘새발의 피’도 아니고 ‘코끼리발의 땀’ 같은 존재다(장하성 고려대교수, 3월 삼성전자 주주총회 후 재벌기업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기엔 참여연대의 역량이 너무 부족하다며).
▽한국경제는 뼈대 굵은 몇몇 대기업에 의해 간신히 지탱되는 골다공증 환자와 다를 바 없다(정덕구 산업자원부장관, 6월16일 우리경제가 비로소 좋은 의사를 만나 대수술을 받고 회복실에 있는 단계라고 말하며).
▽지금처럼 재계 총수들이 사안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조사받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머지않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회의를 대검 중수부장 방에서 해야 할 것같다(경제단체 고위관계자, 12월 중순 오찬 간담회에서).
▽현대가 반도체를 포기하면 ‘썩은 이’를 뽑는 것이지만 LG 입장에선 ‘생니’를 뽑는 것이다(LG반도체 관계자, 1월 반도체 빅딜 논쟁이 한창일 때 반도체를 절대 포기할 수 없다며).
▽정부가 온 국민을 부동산 투기꾼으로 만들고 있다(L건설 임원, 6월 정부가 분양권 전매를 전면 허용한 이후 아파트 청약자의 절반 이상이 전매를 노리고 있다며).
▼사회▼
▽맹수는 병이 깊으면 제살을 물어뜯어 그것이 동티가 나서 죽음에 이른다(최병국 전주지검장, 올 1월 대전 법조비리사건에 연루돼 사퇴를 종용받다가 물러나면서 행한 퇴임식 연설에서 검찰 수뇌부를 비난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다. 눈물은 아무데서나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은 역사 앞에 떳떳해야지 출세나 영달을 위해 가식돼서는 안됩니다. 권력에 대한 향수가 눈물보다 진해서야 되겠습니까(심재륜 전대구고검장, 2월 대전 법조비리사건 당시 항명파동을 겪으며 물러나는 퇴임식에서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이 수사발표 때 흘린 눈물을 가식이라고 비난하며).
▽살모사보다 더 무서운 독사가 라스포사다. 그리고 라스포사 보다 더욱 독이 강한 뱀이 권사(勸士)다. 옷로비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하느님이다(검찰의 고위관계자, 29일 옷로비 사건에서 등장하는 주인공격인 여성들이 기독교 권사이며 성경을 들먹이며 거짓말을 해댄 것을 빗대어).
▽특별판사에게 영장을 청구하든지 해야지…(옷로비사건 특별검사팀의 한 관계자, 라스포사 정일순사장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3번이나 기각당하자).
▽호피무늬 코트를 입지 않고 걸치기만 했다(연정희씨, 검찰과 국회 청문회에서 호피무늬 코트를 받을 의사가 있지 않았느냐는 추궁을 받자).
▽미안합니다. 몸이 아파서…(배정숙씨, 국회 청문회에서 옷로비 사건에 대한 위원들의 추궁을 받자 중병으로 제대로 답변할 수 없다며. 이 말은 코미디 소재로 사용돼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조선시대의 임금들이 당대의 사초(史草)를 보지 않은 것을 우리도 되새겨 보아야 한다(이종왕대검수사기획관, 서경원 밀입북사건에서 불거진 김대중총재 1만달러 수수 및 불고지 사건을 검찰이 재수사해 다른 결론을 발표하더라도 이미 김대중대통령의 무고함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러면 그렇지…’라는 정도에 그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검찰이 권력의 눈치를 살펴 또 수사를 조작했다’라는 비판만 들을 가능성이 높다며
▼문화-스포츠▼
▽나는 달을 가리키고 있는데 사람들은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만 보고 있다(탤런트 서갑숙,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를 출간해 파문이 일자 중국의 옛 선사(禪師)가 한 말을 응용해 자신이 이 책에서 펼친 ‘몸의 담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이제 ‘조폭’하면 ‘조계사 폭력’의 준말로 알아듣는 상황이다(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의 한 직원, 98년에 이어 99년에도 총무원장 자리를 놓고 폭력사태가 발생하자).
▽‘문화연구’는 스스로 모든 예술 중 으뜸이라고 생각해 왔던 문학을 불경스럽게도 영화나 TV, 팝뮤직이나 광고와 똑같은 비중의 문화텍스트로 취급했다(서울대 영문과 김성곤교수, 20세기 세계문학의 흐름을 정리하며).
▽연극 배우들도 공공근로사업을 하게 해 달라(연극배우협회 최종원회장, IMF사태 이후 배우의 65%가 도시빈민 수준인 연간수입 500만원 이하의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며).
▽스필버그가 아무리 위대해도 ‘춘향전’을 연출할 수 없다. 스필버그는 스필버그고 임권택은 임권택이다(한 영화인, 올해초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을 벌이며).
▽영화계의 후배로, 또 그분과의 각별한 인연으로 제가 손수 보내드리는 게 당연하지요(김지미 영화인협회장, 한때 남편이었고 선배배우였던 고 최무룡씨의 장례위원장을 맡으면서).
▽우리나라가 IMF위기를 맞은 것은 배고픈 운동인 권투의 인기가 시들었기 때문입니다(프로복싱 전 세계챔피언 홍수환, 12월14일 새 천년에는 공격적인 정신력이 필요하다며).
▽대한의 남아로 군인이 된다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누구와도 똑같이 열심히 훈련받을 겁니다(미국프로야구 LA다저스의 ‘코리안 특급’ 박찬호, 10월6일 귀국인터뷰에서 군입대소감을 밝히며).
▽내게 이런 재능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머니는 나의 가장 위대한 팬이며 나는 어머니의 것입니다(박세리, 5월10일 미국 스포츠전문지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지의 어머니날 특집회견에서).
▽장군님 품에서 운동하는 것이 영광인데 다른 데로 갈 필요가 있겠습네까(북한의 세계최장신 농구선수 이명훈, 남북 통일농구를 마치고 12월25일 김포공항을 떠나며 가진 기자회견에서 미국프로농구 진출을 부인하며).
〈정리〓최영훈·박제균·박래정·김호성기자〉cyh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