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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12월 24일 19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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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정치상황을 되돌아봐도 여대(與大)구조에서 오히려 여당의 독주로 더 많은 문제가 드러났다는 게 한나라당의 주장이다. 한나라당은 또 김대중(金大中)대통령도 야당 시절 “여소야대가 돼야 정부 여당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면서 여권의 ‘안정론’을 불리한 총선판세를 어떻게해서든 뒤집어보겠다는 얄팍한 술책이라고 비난한다.
▼"DJ 과거 野大 찬양"▼
실제로 김대통령은 평민당의 황색돌풍으로 헌정사상 첫 여소야대가 됐던 88년 13대 총선이 끝난 뒤 “앞으로 투쟁일변도의 종래 야당 자세에서 탈피해 대화와 협력을 통해 문제를 풀어가는 성숙한 자세를 보일 것”이라면서 여소야대 구조를 찬양했었다.
그러나 민정당은 “여소야대 때문에 국정운영이 난맥상을 보인다”며 90년 1월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이른바 3당합당을 결행, 민자당을 만드는 등 작위적으로 여대 구조를 만들었다.
하지만 민자당에서는 내부갈등이 끊일 날이 없었고 소수야당인 평민당이 3당통합 반대 10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정국은 더욱 불안해졌다.
특히 90년 야당의원들이 의원직 사퇴서를 내고 장외투쟁을 벌이다 128일만에 등원해 정기국회가 11월19일에서야 정상화되기도 했다.
또 92년 14대 총선과 96년 15대 총선에서도 여소야대 결과가 나왔으나 여당이 무소속 영입과 야당의원 빼내기를 통해 과반수 의석을 만드는 등 작위적 의정구조개편이 계속됐다.
▼집권당 정치력이 중요▼
96년 12월 한나라당 전신인 신한국당이 과반수 의석을 믿고 노동법을 단독 강행처리했다가 한보사태와 IMF사태로 이어지는 불운을 자초했다는 게 한나라당의 자체 반성이다.
98년 정권교체 후 또다시 여소야대로 상황이 바뀌었으나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야당의원 빼내기로 98년9월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99년 1월 연사흘간 법안을 여당 단독 날치기 처리를 하는 등 국회는 거의 파행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고 경제 사회적 불안과 대 정치 불신은 끊임없이 계속됐다.
지난 10여년의 의정상황을 살펴보면 정국의 안정은 여대냐, 야대냐가 아니라 집권세력이 얼만큼 정치력을 보이느냐가 관건임이 입증된 셈이다.
〈김차수기자〉kimc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