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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8년 6월 8일 19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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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면 94년6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사회당)총리의 자민―사회(나중에 사민당으로 개명)―사키가케 3당 연립정부가 탄생한지 4년만의 일이다. 길게 보면 93년8월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일본신당)총리의 비(非)자민 연립내각이 출범한지 4년10개월만에 명실상부한 자민당 단독정권으로 회귀했다. 그동안의 궤적은 한국의 DJP연립정부에도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첫째는 개혁과 연립의 상충관계다. 93년 자민당 일당통치가 38년만에 끝난 이후 일본정치의 최고명제는 개혁이었다. 그러나 개혁을 수행할 정부는 연립의 형태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호소카와내각은 개혁, 그것도 몹시 어려운 정치개혁을 서두르다 8개월의 단명으로 끝났다. 이에 비해 연립을 중시한 무라야마내각은 일반의 예상을 넘어 1년7개월간이나 존속했다. 그 대신에 무라야마총리는 사회당 본래의 개혁적 정책을 수없이 양보했다.
개혁을 밀어붙이면 연립이 위태로워지고 연립에 집착하면 개혁이 모호해진다는 것을 일본의 연정(聯政)은 보여주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게도 그런 고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혁에 실패하면 국가도 정권도 함께 불행해진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둘째는 의석수와 연립의 긴장관계다. 사민당과 사키가케가 연립여당 이탈의 중요한 이유로 내세운 것은 정치부패방지법에 대한 견해차이다. 사민당과 사키가케는 정치인의 알선이득과 기업 및 단체의 정치헌금을 금지하자고 주장했으나 자민당은 소극적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키가케의 다케무라 마사요시(武村正義)대표는 “자민당이 변했다”고 말한다. 94년 3당 연립정부 출범 초기에는 자민당이 겸허했으나 96년 중의원 총선거 직후 자민당이 신진당 등에서 의원들을 끌어들여 단독과반수를 만든 뒤부터 오만해졌다는 것이다.
의석수가 많아지면 오만해지기 쉬운 법이다. 국민회의가 단독과반수를 이룰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정계개편을 통해 여소야대를 여대야소로 바꾸려는 여권이 자계(自戒)해야 할 대목이다.
셋째는 정치의 ‘안전거리’다. 자민당과 손잡은 이후 사민당은 정체성(正體性)상실의 위기감을 느껴왔다. 선거를 치를수록 의석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7월의 참의원 선거를 또 연립여당으로서 치른다면 당의 존립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판단해 이탈을 결심한 듯하다. 뒤늦게 ‘안전거리’를 회복한 셈이다.
비정상적이지만 한국의 정당들은 배타적 지역기반 이상의 정체성을 별로 갖고 있지 못하다. 국민회의와 자민련도 그렇다. 그런 양당을 향해 “차라리 합치라”고 충고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양당, 특히 자민련은 지금의 상태가 ‘안전거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낙연<논설위원>naky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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