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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8년 4월 22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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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집권후 ‘대연정(大聯政)’을 구상했다. 그는 ‘수(數)의 논리’가 아니라 대화와 타협에 의한 정국운영을 기대했다.
그래서 인위적이고 공작적인 ‘의원 빼오기’를 통한 정계개편이 아니라 정파간의 연합에 더 큰 비중을 둬왔다. 정파간 견제와 협력에 의한 조화라는 ‘이상론’이다. 김대통령이 주위의 강력한 건의에도 불구하고 과반수의석확보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은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하지만 취임 후 전개된 정치상황은 이런 ‘꿈’을 짓밟아버렸다.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지적도 대두됐다. 총리인준에서 추경예산안 처리에 이르기까지 ‘거야(巨野)’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무엇 하나 관철시킬 수가 없었다.
그 결과 김대통령은 연정에 의한 국정운영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궤도를 수정한 것으로 관측된다.
청와대의 한 핵심인사는 “정계개편의 밑그림은 지역간 연합과 개혁연합 등 두가지였으나 현시점에서는 그 가능성이 물건너갔다”고 말했다.
지역간 연합은 호남―충청 등 ‘서군(西軍)’이 주축인 여권과 대구―경북―부산―경남 등 ‘동군(東軍)’으로 이뤄진 야권이 사안별로 연합하는 구도다. 개혁연합은 이른바 ‘신(新)민주대연합론’에 기초한 민주화세력간 연합이다. 그러나 신정부출범 후 일련의 인사와 ‘4·2’재보선 등을 거치면서 지역감정과 동서대립양상이 더욱 심화됐다. 자연히 이같은 대연정구상은 당분간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게 됐다.
대신 후반기의 안정적인 국회운영을 위해 과반수의석확보가 필수적이라는 ‘현실론’에 따라 ‘각개격파’ 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방향을 돌린 국민회의의 행보는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한 핵심당직자는 “즉시 입당할 한나라당의원이 10여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청와대인사도 “30여명의 한나라당의원들이 직간접으로 입당의사를 밝히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드라이브는 필연적으로 한나라당의 반발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이 점이 국민회의의 또 다른 고민이다.
〈최영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