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李姬鎬(이희호)여사는 멋쟁이가 됐다는 인사를 많이 받는다. 뽀글뽀글한 「아줌마 파마머리」를 과감하게 자르고 화장도 화사하게 하고 있다. 기자가 지난 19일 일산 자택을 찾았을 때도 매무시를 다듬느라 30분 이상 인터뷰가 늦어졌다.
―김대중총재도 요즘 스리버튼 양복에 노란색 넥타이,때로는 멜빵을 하던데 이여사의 뒤늦은 변신은 부창부수(夫唱婦隨)입니까.
『남편의 멜빵은 지난 결혼기념일(5월10일)에 제가 선물한 거예요. 주변에서 저도 이미지를 부드럽게 바꿀 필요가 있다고 자꾸들 얘기해서…. 사실 저는 천성적으로 꾸미는데 별 관심이 없어 집에서 머리를 만졌었거든요』
―일산 집에도 부부의 문패가 나란히 걸려있더군요. 김총재가 여성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은 스캔들이 없기 때문이라는 조크가 있을 정도로 애처가로 소문나 있습니다. 김총재가그나이 한국 남자로서는 드물게 평등한 여성관을 갖게 된 것은 이여사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요.
『남편은 TV드라마에서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이 나오면 저보다 먼저 흥분할 만큼 타고난 페미니스트예요. 남편이 옥중에서 저에게 보낸 편지들은 모두 「사랑하고 존경하는 당신에게」로 시작되지요. 사랑한다는 말은 할 수 있어도 아내에게 존경한다고 말할 수 있는 남편이 얼마나 되겠어요』
이여사는 미국 망명시절 김총재가 이따금 자신을 위해 커피도 타주고 오믈렛도 만들어줬다고 자랑한다.
―62년 결혼당시 얘기를 들려주세요.
『결혼할 당시 남편은 국회의원 낙선을 계속해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어요. 그런데다 노모에 시누이에 아이가 둘이나 딸린 홀아비였으니…. 그러나 신념이 투철하고 꿈꾸는 목표가 원대하더군요. 그것을 달성하려면 제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어요』
이여사는 『가능성과 사람됨됨이만 보고 미래를 거는 엄청난 모험을 했다』고 회고한다.
사실 처녀 때 이여사는 「잘 나가는」 신여성이었다. 서울의 유복한 의사집안에서 태어나 여자의 대학진학이 뉴스가 되던 시절 이화여전과 서울대사대를 졸업했다. 그리고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다. 대한여자청년단 외교국장, 이화여대강사, 대한YWCA총무 등을 지내며 김정례 이태영 박순천씨 등 한국 여성사를 만들어온 인물들과 함께 일했다.
이여사는 정치인 김대중과 함께 많은 시련을 겪었다. 71년 대선에서 박정희후보에게 패한 후에는 미행과 도청, 구금 연금 망명의 연속이었다.
―이여사가 김총재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훌륭한 여성지도자가 됐을 거라는 말도 있던데요.
『물론 남편과 결혼한 탓에 이런저런 외압으로 여성단체의 회장직을 포기한 적도 몇 번 있어요. 그러나 그때마다 민주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결혼을 후회한 적은 없어요. 만일 남편이 사회활동을 못하게 했다면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겠지요』
이여사는 오히려 이런 역경속에서 남편의 빈 자리를 메워나갔다. 세 아들에게는 아버지 역할까지 했고 남편의 석방과 구명을 호소했다. 김총재에게 직접 말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고언(苦言)도 서슴지 않았다.
김총재에겐 이번이 네번째 대권도전. 이여사는 『후보 부인들에게도 시선이 모아지고 언론에 비친 이미지로 승패가 판가름날 것이라는 이번 선거가 가장 어렵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김세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