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입국]현철씨 북경접촉說등 궁금투성이

  • 입력 1997년 4월 20일 20시 08분


전북한노동당국제담당비서 黃長燁(황장엽)씨의 망명사건을 둘러싼 세간의 의혹은 어느정도 풀렸나. 물론 정부당국의 설명으로 사건발생 초기에 제기된 일부의혹은 상당히 풀린 대목도 있다. 우선 황씨가 외교적 마찰이 예상되는 중국 북경(北京)을 굳이 망명신청지로 택한 점이다. 이에 대해 정부 고위관계자는 『황씨는 당초 세미나가 열린 일본에서 망명할 계획이었다』며 『그러나 황씨가 북한 쌀문제를 다룰 핵심인물로 떠오르는 바람에 한국언론이 취재경쟁을 벌일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조총련측의 삼엄한 경비로 좌절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황씨의 탈북과 한국망명에 관련해 아직까지 석연치 않은 대목도 많다. 첫째, 황씨와 金泳三(김영삼)대통령 차남 賢哲(현철)씨의 북경접촉설이다. 이미 망명의사를 굳힌 황씨가 자신의 망명을 보장해줄 수 있는 남한내 비중있는 인물의 「최종확인」을 요구해옴에 따라 작년 9월 북경에서 현철씨와 황씨의 측근 金德弘(김덕홍)씨가 만났다는게 북경접촉설의 골자다. 특히 이 과정에서 안기부가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를 밝혀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둘째로 황씨가 주체사상을 체계화한 대표적 학자며 74세의 고령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학자적 양심만으로 가족을 버리고 망명을 감행할 수 있었을까라는 점이 의문점이다. 셋째로 황씨가 북경에 체류하는 동안 중국의 중재하에 대북식량지원을 조건으로 북한이 황씨의 망명을 용인해줬다는 남북간 밀약설이다. 일부 외신에서 제기한 것처럼 당시 남북간 접촉에는 지난 95년 쌀지원당시 막후협상에 나섰던 남북한 당사자가 직접 개입, 20만∼30만t의 식량을 북한측에 제공하기로 합의했다는 추측이 무성했다. 넷째는 황씨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진 지난 1월2일자 편지의 진위여부다. 편지에 나타난 「남북간의 대립」은 「북남간의 대립」, 「여당」은 「집권세력」 또는 「신한국당」, 「학생소요」는 「학생데모」라고 해야 정확한 북한식 표현이라는 지적이다. 굳이 망명사실을 서둘러 발표한 점도 아직 풀리지 않고 있는 대목이다. 더구나 그의 신병이 중국주재 한국대사관에 있는데도 중국측과 협의 한번 안한 단계에서 이를 공식 발표한 것은 국내정치용이었다는 비판과 함께 그의 망명을 정부핵심권에서 사전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연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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