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長燁(황장엽) 전북한노동당비서의 「서울도착 인사말씀」은 몇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우선 황씨는 북한의 전쟁도발 가능성을 여러차례 언급했다. 그는 남북의 대립을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가 아닌 「전쟁 대 평화」의 대립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이제 북조선은 수십년동안 전력을 다하여 키워온 막강한 무력을 사용하는 길밖에 없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전쟁의 위험성과 자신의 망명동기를 결부시켰다.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것을 합쳐도 7천만 민족의 생사와 바꿀 수 없다는 양심의 명령에 따라 서울행을 결행했다는 것이다.
그의 이같은 주장은 망명직후인 지난 2월12일 작성한 성명서와 자술서에서도 강조됐던 대목이다. 『남조선에서 북조선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라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으면 머저리라고 단언하고 싶다』(성명서)
『민족을 불행에서 구원하기 위한 문제를 남(南)의 인사들과 협의해 보기로 결심하였다』(자술서)
이와 함께 황씨는 이날 『나는 이미 민족앞에 큰 죄를 지었으며 부끄럽기 그지없다』고 참회의 심경을 피력,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이를 주체사상의 포기나 사상전향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는 이날 남한에 미칠 파장을 의식해서인지 주체사상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북한을 「봉건독재」 「봉건적 군국주의」라고 질타했다. 이는 현재의 북한이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주의나 주체사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 정부의 한 고위당국자도 『황씨는 자신이 창시한 주체사상이 「인간운명개척의 길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황씨는 「인사말씀」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간직한 채 남쪽에서 나름의 역할을 해보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려 했다는 분석이 더욱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가 서울공항에서 보인 당당한 자세나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에서 『갈라진 조국의 어느 한 부분만을 조국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망명 귀순 등은 나하고는 관계가 없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듯하다.
한편 그가 북한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한층 높이면서 남한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은 것도 특징적이었다. 그는 이날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건설해 놓았다고 호언장담하던 나라가 빌어먹는 나라로 전락됐다』고 북한을 몰아붙였다.
이는 그가 중국에 머물 때 쓴 자술서에서 남북한에 대한 「균형적 시각」을 잃지 않으려 했던 것과는 달라진 태도다. 그는 자술서에서 「조선노동당과 그 영도자들에 대해서는 감사의 정이 있을 뿐 사소한 다른 의견도 없다. 공화국(북한)이 경제적으로 좀 난관을 겪고 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잘 단결돼 있기 때문에 붕괴될 위험성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혔었다.
〈문 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