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이혼 이후 2년간 친척집을 전전하던 하태욱 씨(19)가 서울 관악구의 아동·청소년 공동생활가정(그룹홈)인 ‘샘물의 집’에 온 건 초등학교 5학년 때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룹홈에 온 지 2년째 되던 해의 어느 날 그룹홈 선생님의 피아노 연주가 가슴속으로 불쑥 들어왔다. 그는 원장 선생님에게 피아노학원에 다니게 해달라고 졸랐다. 소년에게 처음으로 꿈이 생겼다. 정명훈 서울시향 상임지휘자처럼 세계적인 지휘자가 되고 싶었다.
하 씨는 지난해 입시에서 추계예대 작곡과에 합격하면서 자신의 꿈에 한발 다가섰다. 그룹홈 학생 중 대학에 진학하는 사례는 드물다. 특히 어려서부터 체계적으로 교육이 필요한 음대 진학은 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하 씨의 대학 진학은 한 대학생 누나의 봉사활동 덕분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피아노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하 씨는 음악을 전공한 그룹홈 후원자 등의 도움으로 서울 덕원예고 작곡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서 그는 ‘음악 초보’였을 뿐이었다. 피아노 실기 성적은 늘 하위권을 맴돌았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웠던 다른 학생들과 경쟁이 되지 않았다.
실의에 빠져 있을 무렵 당시 서울대 피아노과 2학년생이던 고연경 씨(22)를 만났다. 고 씨는 태광그룹 산하 일주학술문화재단 장학생으로 그룹홈 학생들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고 씨는 “어려운 형편이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간직한 태욱이를 보니 안타까웠다”며 “내가 가진 재능으로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 씨는 음대에 진학하고 싶다는 하 씨를 위해 매주 서울대 연습실을 빌려 피아노 과외를 시작했다. 고 씨는 “집이 수원이어서 서울대에 오려면 2시간이 넘게 걸리는데 방학 때도 빼먹지 않고 레슨이 있을 때마다 학교에 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실력이 늘지 않았다. 하 씨의 기초가 부족했던 탓이다. 결국 피아노 치는 자세부터 다시 가르치기 시작했다. 기초가 쌓이면서 피아노 실력은 조금씩 나아졌다. 하 씨는 “어렸을 적부터 피아노를 쳐 왔던 친구들을 따라잡기 힘들었는데 누나를 만나 실력이 늘기 시작했다”며 “고 2까지는 과에서 꼴등이었는데 고3 졸업시험 피아노 실기에선 과 1등을 했다”고 말했다.
입시철이 가까워지면서 두 사람은 본격적인 음대 입시 준비에 들어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그동안 머물던 그룹홈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두 사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하 씨는 “형편상 재수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절박했다”고 말했다.
초조함에서 온 스트레스로 입시를 한 달 앞두고 하 씨에게 강박증 중 하나인 ‘발모벽’(스스로 머리카락을 뽑는 증상)이 발병하기도 했다. 하 씨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는데 병원에서 받아온 약을 먹으면 자꾸 졸음이 쏟아져 레슨을 제대로 받기조차 힘들었다”고 말했다.
하 씨는 올해 봄 대학에 입학하며 샘물의 집을 떠났다. 아르바이트와 대학 생활로 바쁘지만 그는 오늘도 자신의 꿈을 향해 한 발씩 다가가고 있다. 하 씨는 “학교생활도 제대로 하고 싶고 유학도 가고 싶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여전히 내 꿈은 세계적인 지휘자가 되는 것”이라며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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