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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년 10월 16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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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동구 광산동 옛 전남도청 앞마당에 15일 마련된 고 홍남순 변호사 분향소에는 노무현 대통령과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 한화갑 민주당 대표 등이 보내온 조화가 놓였다.
이날 분향소에는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과 김한길 원내대표,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 이수성 전 국무총리 등 각계 인사와 평범한 시민들의 추모 행렬이 이른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이어졌다.
문상객들은 한결같이 “광주의 큰어른이 가셨다”며 애도했다. 김근태 의장은 방명록에 ‘슬픕니다. 정말 그리워할 것입니다’라고 써 애통한 심정을 드러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을 계기로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된 광주에서 그의 존재는 ‘실천하는 양심’ 그 자체였다.
‘큰어른’으로서 불의에 항거해 가장 먼저 거리로 뛰쳐나왔고, 가장 먼저 감옥에 들어갔지만 자신의 공을 인정하는 데는 끝까지 겸손했다.
1990년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후 4300여 명의 부상자 구속자 등이 2200억여 원의 보상금을 받았지만 그는 보상신청서를 내지 않았다.
가족들은 “보상 이야기만 나오면 ‘죽은 이들에게 부끄럽다. 소신껏 참여한 일에 무슨 보상이냐’며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고 그의 옹고집을 전했다.
1998년 광주시 직원들이 찾아와 “이제는 보상금을 신청하시라”고 권유하자 고인은 “없는 사람들을 도와 줘라”며 돌려보내면서도 “내가 돈을 받지 않은 것 때문에 보상금을 받은 이들에게 누를 끼치지나 않을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고인의 인권운동 역정은 박정희 정권 당시인 한일회담 반대(1964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5·18민주화운동의 격랑과 부닥치며 본격적인 고난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유신정권 아래서 33건의 긴급조치 위반사건 변론을 맡는 등 이미 인권변호사로 이름났던 그는 광주에서 계엄군의 시민군 진압이 초읽기에 들어가자 수습대책위원들과 함께 계엄군사령관과 담판을 벌였다.
무기 회수 문제로 협상이 결렬되자 그는 광주의 긴박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윤보선 전 대통령 등 정치인을 만나러 서울로 가던 길에 계엄군에게 붙잡혔다.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간 그는 69일 동안 감금돼 “학생들을 사주한 사실을 시인하라”는 군 수사관들에게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는 1980년 10월 육군 보통군법회의에서 내란중요임무종사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15년으로 감형을 받았다가 1981년 12월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모아둔 재산이 없었던 탓에 가족들은 고인이 1985년 8월 복권돼 변호사 자격을 회복할 때까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다.
석방 이후 그는 칠순이 넘는 고령에도 광주구속자협회장, 5·18광주민중혁명기념사업 및 위령탑건립추진위원장 등을 맡아 최루탄이 터지는 거리시위마다 나서서 정부의 보상과 피해자 명예회복, 기념일 제정 등을 이끌어 내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박석무(전 5·18기념재단 이사장) 단국대 이사장은 “민주의 성지인 광주의 어른이자 이 나라의 원로이신 큰어른을 언제 다시 뵐지 슬프고 가슴이 막힌다”며 “그토록 원하시던 민주화가 정착된 만큼 편히 잠드시길 빈다”고 비통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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