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군 「고문치사」 역사속에 묻힐뻔 했다』

  • 입력 1998년 1월 14일 19시 42분


서울대생 박종철(朴鍾哲)군 고문치사사건이 하마터면 ‘화장(火葬)’처리돼 역사의 무덤에 묻힐 뻔했던 새로운 사실이 박군 사망 11년만인 14일 밝혀졌다.

박군 시체의 부검을 지휘한 검찰 공안부 관계자들은 이날 박군을 고문 끝에 숨지게 한 경찰이 사건발생 직후 시체를 화장하려 했지만 검찰 관계자들이 거부하는 바람에 부검하게 됐었다고 증언했다.

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군 고문치사 은폐조작사건은 부검이 없었다면 진상이 제대로 밝혀질 수 없었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화장거부’는 6월 항쟁의 또하나의 숨겨진 전사(前史)였던 셈이다.

검찰 관계자들에 따르면 치안본부 핵심간부들은 박군 사망 7시간 후인 87년 1월14일 오후 7시반경 최환(崔桓·현 대전고검장)서울지검 공안2부장을 찾아갔다.

이들은 최부장에게 “조사과정에서 피의자가 사망했는데 가족과 합의했으니 시신을 화장할 수 있도록 서명해달라”고 요구했다.‘탁’치니‘억’하고 죽었다는 내용의 사건발생 보고서도 함께 제시했다.

최부장은 그러나 “정식 변사사건으로 다루어 정확한 사인을 규명하라”며 거부했다.“의혹이 많을수록 오해의 소지도 크니 나중을 위해서라도 부검을 하자”고 설득하기까지 했다.

권력핵심의 회유와 압력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부검을 관철시켜 다음날 서울지검 형사2부 안상수(安商守·현 한나라당 의원)검사의 지휘로 부검이 실시됐다.

그러나 최고검장은 “아직 공직에 있는 만큼 지난 일을 나서서 말할 수 없다”며 증언을 사양했다.

한편 박군 사망 11주기 추모행사가 이날 오후 3시 서울대 중앙도서관 옆에서 학생 시민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서울대 총학생회 주최로 열린 이날 집회에는 박군의 아버지 박정기(朴正基)씨와 박군 추모사업회 회장 김승훈(金勝勳)신부 등이 참석했으며 김대중(金大中)차기대통령이 ‘국민회의 총재’명의의 대형화환을 보냈다.

〈이수형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