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건 상명대 스포츠ICT융합학과 교수2026 북중미 월드컵이 홍명보 감독 체제의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새롭게 판을 짤 기회가 주어졌다는 점에서 차라리 잘됐다. 한국 축구 대표팀에 이번 월드컵은 역대 최고의 유럽파 스쿼드, 상대적으로 쉬운 조 편성, 편안한 경기 일정 등 어느 대회보다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감독의 경기 운영과 대한축구협회의 리더십이 동시에 도마에 오르는 대실망극으로 끝났다. 특히 전술적 한계와 함께 ‘무엇이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는 감독의 태도는 모두를 허탈하게 했다. 정몽규 축구협회장은 이미 월드컵 폐막과 함께 물러나겠다고 공언했고, 29일 물러난 홍 감독도 더 이상 한국 축구에 아무런 흔적을 남길 수 없게 됐다.
그동안 한국 축구 행정은 장기 집권한 회장의 비틀린 권위로 얼룩졌고, 이해관계로 나뉜 그들만의 ‘밀실 동창회’였다. 위르겐 클리스만 감독을 교체하면서 수십억 원의 위약금을 날리고도 반성은커녕 인재 돌려막기에 급급했던 협회의 조직문화와 행태는 오늘의 비극을 잉태한 주범이다. 자,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축구협회의 전면적 개혁이 출발점이 돼야 한다. 당장 인적 쇄신과 행정 투명성을 확보할 첫걸음으로, 이해관계자들로부터 독립된 개혁기구의 구성이 불가피해 보인다. 이를 통해 의사결정 과정의 민주화와 무엇보다 지속 가능한 행정 시스템이 뿌리내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2024년 발표된 ‘한국 축구 기술철학(MIK·Made in Korea)’을 다시 꺼내, 무너진 한국 축구의 백년대계를 처음부터 다시 점검하자. 이 거대한 새판 짜기는 서로 다른 전문성과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해야 가능한 일이다.
우선 천문학자의 시야가 필요하다. 단지 ‘몇 년 후 우승’이라는 성적을 넘어 ‘이것이 바로 한국 축구’라고 세계가 알아볼 수 있는 정체성을 만들자. 유소년 육성 철학은 무엇이며, 기술위원회의 독립성은 어떻게 보장되고, 우리가 추구할 축구 정신은 무엇인지 고민하자.
동시에 전략가의 치밀함도 필요하다. 전략가는 비전을 인력과 예산, 조직으로 구체화하는 사람이다. 100년의 축구 계획을 실천하려면 연령별 선수 관리, 지역별 인재 육성, 프로와 아마추어의 상생 등 요소요소에 정교한 시스템을 촘촘히 조각해야 한다.
역사학자의 관점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가 과거에 외부의 장점을 어떻게 흡수해 성공했는지 겸손하게 되돌아보자. 이웃의 성공을 시샘할 시간에 우리가 배워야 할 본질이 무엇인지, 놓친 핵심은 없는지 꼼꼼히 되짚는 집요함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빈틈을 찔러대며 끊임없이 보완할 ‘악마의 변호인’도 곁에 두자. 개혁을 시작할 지금은 동화 작가의 손길도 필요하다. 동화가 꿈을 심어주듯, 축구는 우리의 마음을 뛰게 한다. 상처를 입은 축구 팬들의 마음을 비전과 따뜻한 위로로 어루만질 치유의 계획도 내놓아야 한다.
오늘은 한국 축구가 미래를 설계하는 첫날이어야 한다. 중지를 모으자. 비난과 조롱의 ‘중지(中指·가운데 손가락)’가 아닌 여러 사람의 지혜를 뜻하는 ‘중지(衆智)’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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