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휴양지이자 맑은 생수의 대명사인 프랑스 동남부 에비앙에는 레만호수가 자리하고 있다. 알프스의 만년설이 녹아들어 세상에서 가장 투명한 호수로 명성이 높은 곳이다. 프랑스 은퇴자들이 말년을 보내고 싶은 지역이라고 한다. 하지만 최근 출장길에 들렀던 에비앙은 안개가 자욱해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봤던 에메랄드 색감의 호수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무채색 빛깔에 을씨년스러운 기운마저 감돌았다. 변덕스러운 날씨가 세계적인 휴양지의 풍광을 이처럼 극명하게 뒤바꿀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나치 광풍 막지 못한 1938년 에비앙 회담
실제로 에비앙은 안개가 낀 레만호처럼 스산한 역사를 지닌 곳이다. 1938년 7월 세계 32개국 대표단이 나치 독일의 유대인 박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에비앙에 모였다. 참가국들은 “유대인 탄압은 반대하지만, 난민을 수용할 순 없다”며 사실상 사태를 방관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에비앙 회담의 실패는 국제 정치의 냉혹한 민낯을 드러내며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사 최악의 비극 중 하나를 방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훗날 역사가들은 ‘죽음의 판결문이 에비앙의 고급 필기구로 쓰였다’고 지적했다.
다음 달 15일 에비앙에선 올해 최대 외교 무대 중 하나가 열린다. 바로 ‘2026 에비앙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다. 프랑스 엘리제궁(대통령실)에 따르면 이번 회의엔 한국, 인도, 브라질, 케냐도 초청받았다.
중요한 건, 이번 에비앙 G7 정상회의에선 이전의 ‘평범한 G7 회의’ 때와는 상당히 다른 판이 펼쳐질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G7이 선진국 클럽의 결속력을 과시하며 거시경제나 환경 담론을 주로 다뤘다면, 이번 에비앙 G7은 전시 체제에 준하는 비장함과 분열이 지배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란 전쟁 여파로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유럽과 미국의 정상들이 설전을 펼칠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이 과정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동맹국들에 호르무즈 해협 안정화 작전 등에 파병 같은 구체적인 안보 청구서를 요구할 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HMM 소속 ‘나무호’가 폭발 사고를 겪자 한국을 콕 지정해 “이제 동참할 때”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이전에도 그는 유럽과 아시아 동맹들을 겨냥해 트루스소셜 등을 통해 파병과 작전 참여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가 주요국 정상들을 직접 대면한 자리에서 이런 요구를 강조할 경우 SNS나 기자회견을 통해 압박했을 때와는 한 차원 다른 상황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전략적 모호성이나 임기응변만으로는 모면하기 힘든 순간이 될 수 있단 얘기다.
다음 달 에비앙 G7에서 韓 샌드위치 우려
G7 의장국인 프랑스를 포함해 유럽 국가들도 한국 등 초청국들에 이란 전쟁과 관련된 유럽 입장을 강조할 것이란 전망도 제기된다. 미국과는 결이 다른 방식으로 이란 전쟁의 해법을 제시하며 동참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미국과 유럽 중 어느 한쪽의 손을 들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양쪽 모두 거절하기도 어려운 ‘샌드위치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이른바 ‘선진국 클럽’에 초청된 것만으로도 “글로벌 중추 국가로 성장했다”며 안도하는 시대는 지났다. 특히 이번 에비앙 G7은 ‘기회’라기보다는 ‘리스크 관리’가 절실한 살얼음판 외교 전장이다. ‘이렇게 예민한 시기에 차라리 가지 않는 게 좋았다’는 평가가 나올 수도 있다. 그렇기에 에비앙에서 마주하게 될 냉엄한 국제정치 리스크에 대한 정교한 시나리오 분석과 세밀한 대비가 필요하다. ‘샌드위치 딜레마’를 돌파할 전술 전략 없이 에비앙 G7에 참여한다면 안개 자욱한 레만호에서 길을 잃을 우려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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