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없는 유엔’[횡설수설/박용]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1월 8일 23시 19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위해 6년 만에 뉴욕 유엔본부를 찾았다가 낭패를 겪었다. 회의장 가는 에스컬레이터는 중간에 멈췄고 연설문 프롬프터는 작동하지 않았다. 회의장 음향도 문제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엔의 삼중 사보타주(정상 운영을 방해하려는 고의적 파괴)”라며 발끈했다. 미국 우선주의를 주장하는 트럼프 대통령과 다자주의 국제질서의 상징인 유엔은 처음부터 궁합이 안 맞는 쪽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집권 1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유엔을 ‘떠들고 즐기는 사람들의 사교클럽’이라고 비꼬고, “취임 후 유엔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취임 후 첫 유엔총회에서 대선 슬로건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서 ‘다시(again)’를 쏙 뺀 뒤 “유엔을 위대하게(Make the United Nations great)”라고 했다. 미국이 20세기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고 1945년 창설을 주도한 유엔의 과거를 부정한 것이다. 그러면서 “유엔은 관료주의와 잘못된 관리로 인해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며 개혁을 촉구했다.

▷집권 2기에선 더 독해졌다. 트럼프는 유엔 창설 80주년인 지난해 유엔 연설에서 “유엔이 하는 건 매우 강한 어조의 편지를 쓰고 실행에 옮기지 않는 것뿐”이라며 ‘유엔 무용론’을 제기했다. 결국 그는 7일 유엔 산하기구 31개 등 국제기구 66개에서 탈퇴하는 대통령 각서에 서명했다.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국제기구에서 탈퇴함으로써 납세자의 돈을 절약하겠다”고 했다.

▷미 국무부는 유엔 기구에 대해 “Adapt, shrink or die(적응, 감축하지 않으면 없어져야 한다)” 원칙을 제시했다. 미국 정책에 적응해 방만한 조직을 감축하지 않으면 사라져야 한다는 뜻이다. 미국 입맛에 맞는 지원만 하겠다는 일종의 ‘선별적 다자주의’ 방침이다. 미국이 건설한 자유무역과 다자주의 질서가 미 중산층을 붕괴시키고 국익을 훼손했으니 더는 세계의 경찰과 국제질서 수호자 역할을 위해 달러를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를 쓴 지정학 전문가 피터 자이한은 미국이 세계 경찰 역할을 포기하면서 국가 간 갈등이 심화하는 각자도생의 세계를 경고했다. 미국은 유엔 정규 예산의 22%, 평화유지활동(PKO) 예산의 25%를 대는 최대 분담국이다. 유엔은 2월에 분담금을 통보하는데, 제때 납부한 국가는 50여 개국에 그친다.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4월 기준 미국이 체납한 분담금이 모두 30억 달러가 넘는다. 미국의 돈과 군대가 빠진 유엔은 트럼프의 말처럼 ‘국제 사교클럽’에 불과하다. 세계는 ‘미국 없는 세계’를, 유엔 193개 회원국은 ‘미국 없는 유엔’을 대비해야 할 때가 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유엔#미국 우선주의#다자주의#국제기구 탈퇴#유엔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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