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여행은 겨울이 제철이다. 휴양이나 관광이 아닌 어딘가 새롭고 낯선 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의미로서의 여행이라면. 이 의미에 딱 맞는 영화가 바로 심은경이 출연한 영화 ‘여행과 나날’이다. 미야케 쇼 감독이 연출한 일본 영화지만 심은경은 이 작품에서 슬럼프에 빠진 한국인 각본가 ‘이’로 출연해 한국어와 일본어를 오가며 연기한다. 심은경 배우 자신이 언어를 넘나들며 연기하고 느꼈던 ‘여행의 경험’이 영화 속 ‘이’라는 인물과 맞닿아 있다. 언어가 익숙해지는 순간 새로움의 긴장감이나 설렘이 사라지는 것처럼, 낯선 곳도 익숙해지면 일상이 되어 버린다. 언어와 여행이 비슷한 이유다.
“나는 말(言)이라는 틀에 갇혀 있다. 여행이란, 말에서 도망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영화 속 이는 그렇게 말하며 여행을 떠난다. 눈발이 날리는 설국의 지도에도 없는 깊은 산속 여관에서 무심하고 퉁명스러운 주인 벤조와 지내게 된다. 사실 굉장한 모험이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이 주인의 엉뚱한 짓을 함께하고 그의 숨겨진 사연을 알게 되면서 이는 말한다. “이렇게 즐거웠던 건 오랜만이에요.” 하지만 함께한 그 경험이 벤조에게는 일상으로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다. 똑같은 경험도 여행자에게는 새롭고 즐거운 일이지만, 일상으로 살아가는 이에게는 그저 그런 일이다.
‘여행과 나날’은 이처럼 ‘여행’이라는 낯설고 새로운 경험과 ‘나날’이라는 익숙해져 틀에 갇혀 버린 일상을 병치해 놓은 영화다. 특히 움츠러들기 마련인 추운 겨울이 오히려 여행의 제철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말과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고픈 분들이라면 눈 내려 길조차 지워진 곳으로 떠날 일이다. 진짜 삶의 즐거움을 찾을지도 모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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