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내년 계획을 세우려고 다이어리를 펼쳤다. 작년 이맘때쯤 적어둔 목표가 빼곡히 담겨 있었다. 읽다 보니 실망스러웠다. 마음먹은 대로 다 이루지 못했다. 그중 몇 개는 연초부터 손도 대지 않은 항목들이었다. 더 씁쓸한 건 따로 있었다. 적힌 문장들이 지나치게 익숙하다는 점이었다. 나는 퇴직 후 몇 해 동안 비슷한 결심을 반복해서 써왔다. 건강을 관리하겠다, 자기계발을 하겠다 등 표현만 달랐을 뿐 내용은 한결같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왜 매년 똑같은 계획만 세울까. 생각을 거듭할수록 그 이유가 명확해졌다.
첫 번째 이유는 역할의 변화였다. 회사에서는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회의와 보고, 미팅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팀을 이끌었다가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교육을 담당했다가 낯선 업무를 맡기도 했다. 가만히 있어도 새로운 임무가 연달아 주어졌다. 새 일이 끊이지 않는다는 건 집중해야 할 대상이 계속 바뀐다는 뜻이었다. 계획도 그에 맞춰 다시 짜야 했다.
회사를 떠나자 상황은 눈에 띄게 변했다. 하는 일이 없어 일상이 단순해졌고, 연락하는 이가 드물어 챙겨야 할 대상이 적어졌다. 일과라고 해봐야 글을 쓰거나 영상을 만들고 가끔 외출하는 스케줄이 전부였다. 생활이 단조로워진 만큼 활동 범위도 좁아졌다. 어쩌면 계획을 굳이 다르게 세울 필요가 없는 형편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이유는 삶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였다. 직장인 시절에는 전진이 곧 생존이었다. 더 빨리 뛰어야 했고, 더 멀리 가야 했다. 잠시라도 뒤를 돌아보는 여유는 사치였다. 조금이라도 움직임을 멈추는 순간 영원히 뒤처진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계획은 언제나 전진하기 위함이었다. 마지막 도착지는 항상 높은 자리, 더 큰 세계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퇴직과 동시에 그 기준은 바뀌었다. 예전에는 많이 갖는 것을 원했다면, 이제는 가진 것을 잃지 않는 데에 관심을 두게 됐다. 앞만 보며 달리던 나날은 지나가고, 하루를 무사히 보내는 게 가장 큰 과제로 떠올랐다. 의외로 매일의 무탈함이 주는 평온함도 매력적이었다. 뜻한 바를 달성하려고 애쓰는 노력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세 번째 이유는 방향의 상실이었다. 직장에 다녔을 때는 길이 명확했다. 회사가 제시하는 목표가 내 최종 목적지였으니 조직이 하라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됐다. 내가 직접 선택하지 않아도 헤매지 않았다. 문제는 속도였다. 부여받은 여러 사안을 얼마나 빠짐없이, 얼마나 신속하게 처리해내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러나 퇴직과 동시에 길은 사라졌다. 내 장래에 관해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신규 분야 개척’, ‘소득 파이프라인 구축’처럼 원대한 목표를 세워보기도 했다. 솔직히 내 현실에는 맞지 않았다. 누군가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요동쳤다. 그렇다고 그 방면으로 나설 용기가 생기지도 않았다. 결국 거창한 계획은 접고 해마다 같은 다짐만 되풀이하다 또 다른 해를 맞곤 했다.
곱씹을수록 마음이 편치 않았다. 퇴직한 뒤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제자리에 머무는 느낌이었다. 다이어리 안의 계획들은 굳은 각오가 아닌, 성의 없이 끄적거린 메모처럼 보였다. 새해가 밝아오니 당연히 해야 하는 숙제인 양 받아들여졌다. 그 안에 이루고 싶다는 간절함이 담겨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썩 내키지 않아도 놓지 못하는 모습, 그 점이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불현듯 생각이 스쳤다. 수해째 같은 결심을 하고 있다는 게 꼭 나쁘기만 한 걸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고 여겨졌다. 오히려 그만큼 중요하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었다. 평생 다뤄야 할 것들이기에 매해 다시 기록하는 건 아닐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체력을 다지고, 배움을 습관화하고, 주변을 돌보겠다는 맹세들. 화려하지는 않지만 이런 평범한 다짐들이야말로 퇴직자인 나를 붙들고 있는 본질적인 힘인 듯했다.
그런 결론에 이르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새해를 무언가를 바꾸는 시기로 여기지 않기로 했다. 다가올 일 년을 새로이 설계하려 들기보다, 지난 한 해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살피는 기회로 삼으려 한다. 잘한 행동보다 잘 버텨낸 날들을, 달려온 거리보다 멈추지 않았던 지점을 되짚어 볼 참이다. 해가 바뀐다고 인생이 갑자기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내 삶이 나만의 방향과 속도로 흘러갈 것 같았다.
그래서 내년 계획도 더하지 않고 기존 내용을 다듬는 쪽으로 수정했다. 과한 목표는 지우고, 꾸준히 해야 할 것들로 고쳐 넣었다. 아침에 물 한 컵 마시기, 하루 30분 책 읽기 등 작은 실천들이 나를 계속해서 굳건히 지켜주리라 믿는다. 퇴직자의 새해 계획은 세상을 향한 외침이 아니다. 어제보다 조금 나은 나로 살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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