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사슬’ 끊어내니 찾아온 평온… 노년기에 만난 인생의 자유[강용수의 철학이 필요할 때]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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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에 쾌락 못 누려 한탄하지만, 노년은 욕망에서 벗어나는 시기
냉정함과 지혜가 평화-행복 원천
나이보다 중요한 건 ‘삶의 태도’
절도와 절제가 존중받는 노년 길
많은 사람들이 노년은 젊은 시절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고, 시들어가는 시기라고 한탄한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노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간이 욕망의 사슬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노년의 행복, 평정심에 대해
공자는 일찍이 논어의 ‘위정’ 편에서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40세를 불혹(不惑), 50세를 지천명(知天命), 60세를 이순(耳順), 70세를 종심(從心)이라고 불렀다. 인생을 오르막길과 내리막길로 나눈다면 마흔은 산 정상에 이른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이때 미혹됨이 없어 부동(不動)의 마음을 지킬 수 있어야 된다는 가르침이다.》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나이를 들어가며 겪는 삶의 변화에 대한 생각은 동양과 서양이 크게 다르지 않다. 플라톤의 ‘국가’에는 소크라테스와 케팔로스 옹이 노령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대목이 있다. 케팔로스 옹은 나이가 들면서 느낀 인생의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육신과 관련된 다른 즐거움이 시들해지면서 그만큼 대화에 대한 욕망과 즐거움이 커지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 옹에게 죽음을 향해 가는 인생의 길에서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이미 앞서간 어른이 험한 길과 힘든 길, 그리고 순탄한 길을 알려주면 뒤따라가는 이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노년에 이르면 인생에 어떤 고비가 있는지를 물었다. 케팔로스 옹에 따르면 노인들이 모이면 젊은 시절의 즐거움, 특히 성적 쾌락이나 술잔치, 축제의 즐거운 추억을 아쉬워하며 한탄한다. 그들은 무언가 소중한 것을 뺏긴 듯 한때는 잘 살았으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고 역정을 낸다. 자신의 불행을 노령 탓으로 돌리지만, 이유는 따로 있다고 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왼쪽)와 극작가 소포클레스도 나이가 들면서 겪는 인간 삶의 변화에 대해 고민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케팔로스 옹은 그러면서 극작가 소포클레스와의 일화를 들려준다. 어느 날 누군가 소포클레스에게 “선생님, 성적인 쾌락과 관련해서는 어떠신가요? 선생께서는 아직 여인과 관계를 가질 수 있으신가요”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사람아, 그것에서 벗어났다는 건 더없이 기쁜 일일세. 흡사 광포한 어떤 주인에게서 도망쳐 나온 것 같거든.”
노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욕망의 사슬에서 벗어나 큰 평화와 자유가 찾아온다. ‘갖가지 욕망이 뻗치기를 그만두고 조용히 숙어지게 되는 그때’에 인간은 소포클레스가 말한 ‘광적인 주인’에게서 풀려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한 가지 탓(aitia)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노령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 방식(tropos)이 문제라는 점이다. 절도 있고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노년에도 평온하지만, 절제가 없는 사람은 젊은 시절도, 노년도 견디기 힘들어진다.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의 ‘국가’ 서문에 나오는 한 대목에 깊이 공감했다. 플라톤은 백발의 시기에 이르면 그동안 인간을 끊임없이 괴롭혀 온 성욕에서 마침내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노년을 행복하다고 봤다. “인간은 늘 사로잡혀 있는 성욕이나 악마의 영향 아래에 있는 한, 성욕이 만들어내는 다양하고도 끝없는 변덕, 그리고 성욕으로 인해 생기는 격한 감정 때문에 내면이 지속적으로 경미한 망상에 빠져 있게 된다.” 플라톤은 “인간은 성욕이 소멸한 후에야 비로소 완전히 이성적이 된다”고 주장한다.
쇼펜하우어는 ‘청춘은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기이고, 노년은 처량한 시기’라는 통념이 잘못됐다고 본다. 열정은 사람을 고양시키기도 하지만, 청년기에는 그 열정에 휘둘려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큰 기쁨을 맛보지 못한다. 또한 그로 인한 고통에도 시달린다. 오히려 냉정해진 노년에는 열정이 더 이상 사람을 괴롭히지 않기에 이성적인 생활이 가능해진다. 노년의 삶에는 지혜와 인식이 자라 젊을 때의 행복과는 다른 차원이 열린다. 나이가 들어 인식의 힘이 의지를 제어할수록 삶은 더욱 평화롭고 행복해진다.
우리가 뒤늦게야 깨닫는 사실은 이것이다. 열정이 반드시 행복을 보장하지 않으며, 여러 향락을 누리지 못한다고 해서 노년을 탄식할 이유는 없다는 점이다. “온갖 향락은 소극적 성질을, 고통은 적극적 성질을 띠고 있다”는 진리를 되새기며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향유란 언제나 욕구를 달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욕구가 충족되면 향유도 사라진다”며 “식사를 마친 후에는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것처럼, 잠을 푹 자고 난 뒤에는 깨어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탄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청년기에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를 “인간이 아직 악마의 지배를 받으며 심지어 종노릇까지 하기 때문”이라고 봤다. 이 악마는 청년에게 쉽게 자유로운 시간을 허용하지 않으며, 인간을 위협하는 온갖 재앙의 직간접적 원인이 된다. 그러나 노년기는 오랫동안 몸에 채워져 있던 성욕이라는 족쇄에서 풀려나 비로소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시기다. 이러한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청년기는 동요의 시기이고, 노년기는 평온의 시기”라고 말했다.
‘나 때는 말이야’로 대표되는 이른바 ‘라떼’ 화법은 나이 든 사람이 젊은이들을 가르치려 들 때 흔히 보이는 전형적 꼰대의 모습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에 적당히 만족할 줄 아는 절도와 절제다. 특히 젊은이들과 어울려 대화할 때 나이 타령을 하지 않아야 존중받는 어른이 될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인정받으려는 욕망의 크기를 줄이면 상처받을 일도 그만큼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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