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평택 고여사집 냉면’의 풋고추채 고명을 올린 물냉면.
김도언 소설가 제공
한국에서 냉면은 좀 특별한 성격을 갖고 있는 음식이다. 음식에도 사회적 위계가 있을 수 있다는 걸 냉면만큼 명료하게 증명하는 음식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분식집에서 몇천 원이면 사먹을 수 있는 냉면도 있지만 브랜드의 가치를 확보한 명가의 냉면들은 한 그릇에 1만5000∼2만 원을 호가한다.
김도언 소설가브랜드에 대한 충성도도 다른 음식은 넘볼 수 없는 것이어서 자기들이 좋아하는 냉면집을 두고 호사와 논쟁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서 파가 갈리고 자의적인 계급까지 매겨진다. 냉면 마니아를 자처하는 이들 중에는 자신만의 베스트 목록을 가지고 있다. 봉피양, 을밀대, 을지면옥, 필동면옥, 평래옥 등이 꾸준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최고를 다투는 집들이란다. 어디까지나 저들 말에 따르면.
그런데 어떤 바닥이든 알려지지 않은 고수, 사람들의 평판 따위에 큰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자신의 비기를 오롯이 벼려 온 존재들이 있는 법이다. 상기한 유명 냉면집에서 그닥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한 내 입맛을 사로잡은 냉면집이 있으니 바로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평택 고여사집 냉면’이다. 이 집 역시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최애’ 냉면집으로 꼽히지만 절제와 겸양이라는 덕목과 맛과 정성이라는 밑천으로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바른 장사를 하는 집이다.
식당에 들어가면 먼저 홀 안쪽 벽에 이 집의 내력이 보란 듯 적혀 있는데 1930년대에 장사를 시작했다고 하니 물경 90여 년의 전통을 자랑한다. 잠시 요약하면 1대 고학성이라는 분이 평안도 강계에서 ‘중앙면옥’을 시작하고, 그의 아들 고순은 씨가 경기 평택시로 장가를 와서 ‘평택 고박사집’이란 상호로 가업을 잇는다. 1982년 서울 신촌으로 업장을 이전한 뒤 현재는 그의 딸이 ‘평택 고여사집’으로 상호를 바꿔 2008년부터 연희동에서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일개 식당이 자신들의 계보를 이토록 실증적으로 밝히고 있는 데서 나는 이 집의 맛에 대한 자부심을 바투 느끼게 됐다.
자리에 앉고 물냉면(1만4000원)을 시키면 일단 절인 무와 함께 작은 주전자에 뜨거운 육수가 담겨 나온다. 거기에 채로 썬, 얼핏 보면 뭔지 알 수 없는 푸른 채소가 함께 나오는데, 이게 바로 이 집 냉면만이 가지고 있는 차별화와 변별점의 핵심 포인트다. 채소의 정체는 풋고추인데, 냉면 위에 고명으로 올려 먹으라고 내놓는 것. 냉면 고명으로 풋고추채라니! 나도 그랬지만 처음 이런 방식을 권고받은 입문자들은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면의 슴슴하면서도 깔끔한 맛과 구수한 육수와 함께 사각사각 씹히는 향긋한 고추의 풍미가 함께 느껴지는 식감은 상당히 조화롭고도 육감적이다. 물냉면은 뭐니 뭐니 해도 육수 맛이 관건인데, 이 집 육수의 깊고 구수한 감칠맛은 내 기준에서는 따라갈 곳이 없다. 사장님께 여쭤 보니 소 앞다리 살과 뒷다리 살이 육수의 주재료라고 했다.
이 집을 이 코너에 소개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세속으로부터 평판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평판을 유지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개중에 가장 어려운 건 그 평판에서 자유로워지는 일일 것이다. 누군들 평판을 얻고 싶지 않겠는가. 서울 연희동 한복판에서 ‘평택’이라는 심상한 고유명사를 쓰는 냉면집의 저력은 바로 이 자유로움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위계로부터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자신들만의 냉면 미학을 실현하고 있는 고 여사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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