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이상훈]‘묻지 마 살인’ 공포마저 닮아가는 韓日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8월 9일 00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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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단절 심화된 日 ‘도리마 범죄’ 수십 년째 반복
비슷한 난제 앞에 선 양국 머리 맞대고 고민해야

이상훈 도쿄 특파원
이상훈 도쿄 특파원
“세월이 흘렀지만 원통한 마음은 그대로네요. 함께했던 이들이 곁에 없다는 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슬픕니다.”

일본 교토의 유명 애니메이션 제작사 ‘교토애니메이션(교애니)’ 방화 사건 4주기 추모식이 지난달 18일 열렸다. 유족, 직원 등 160여 명이 참석했다. 추모식에서 하타 히데아키(八田英明) 사장은 2019년 7월 아끼던 동료들의 소중한 목숨을 잃은 슬픔을 이렇게 말했다.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을 겪은 교애니는 지금도 새로운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 작품의 속편, 극장판만 내놓고 있다. 하타 사장은 “아직 새 작품을 만들 제작력이 없다. (직원 사망으로) 잃어버린 힘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낮췄다.

당시 방화로 36명이 죽고 33명이 다쳤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서 방화로 가장 많은 이가 숨진 사건이다. 당시 41세였던 남성 범인은 교애니가 자신의 응모작을 떨어뜨린 뒤 아이디어를 훔쳤다는 망상에 빠져 건물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이 범인은 도둑질을 하고 이웃집에 협박을 해 수감됐던 전력이 있다. 사회에서 소외된 범인이 ‘세상이 나를 평가해 주지 않는다’는 잘못된 생각에 끔찍한 ‘묻지 마 방화’를 저질렀다는 게 전문가 진단이다.

일본에서는 이런 유의 범죄를 길거리를 배회하는 악마라는 뜻의 ‘도리마(通り魔) 범죄’로 부른다. 수십 년째 지속되는 사회문제다. 2021년 도쿄 전철에서 불을 지르고 승객을 무차별적으로 찌른 26세 남성은 지난달 1심에서 징역 23년을 선고받았다. 범인은 시민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일부러 정차 간격이 긴 급행 전철을 선택했다고 진술해 충격을 안겼다. 올 5월에는 나가노현에서 흉기를 휘두르고 총을 쏴 경찰 등 4명을 죽인 사건이 터졌다. 범인은 “나를 왕따 바보 취급을 했다”고 이유를 댔지만 죽은 피해자는 범인과 모르는 사이였다.

한국에서 잇따르는 묻지 마 범죄와 유사한 일본의 도리마 범죄의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사회와의 단절을 꼽는다. 하라다 다카유키 일본 쓰쿠바대 교수(범죄심리학)는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범죄자들은 세상이 자신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공통점이 있다. 사회 관계성이 끊어지면 (남을 생각하는) 사회적 행동을 취할 이유가 없어진다”고 했다.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 나는 그냥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말한 신림역 흉기 난동범 조선, 평소 사회적 유대 관계 없이 은둔형 외톨이로 살았던 살인범 정유정 등의 상황도 비슷하다.

한국 묻지 마 범죄와 일본 도리마 범죄를 둘러싼 사회적 배경도 다르지 않다. 고도 경제 성장이 정점을 찍은 후 나타난 경기 침체, ‘미래에 물려줄 세상이 아니다’라며 아이를 낳지 않는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 ‘불행하다’는 생각이 전염병처럼 번지는 사회에서 극단에 선 이들은 묻지 마 범죄자가 된다. 별다른 해답을 못 찾으며 우왕좌왕하는 정부의 모습조차 두 나라가 똑같다.

서구의 경제 발전을 뒤쫓아 경제 대국이 된 일본. 그런 일본을 모델로 선진국으로 도약한 한국. 이제는 사회적으로 고립된 ‘외로운 늑대’형 범죄에 맞서고 사회 시스템을 점검해야 하는 같은 난제 앞에 섰다. 경제 사회의 발전 흐름과 작동 메커니즘이 닮은 한일 양국은 다른 나라보다 특히 서로 고민하고 배울 점이 많다. 뚜렷한 모범 답안이 없는 이 문제에 양국이 머리를 맞댄다면 조금이라도 나은 해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상훈 도쿄 특파원 sanghun@donga.com


#묻지 마 살인#도리마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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