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워지기 위해 스스로를 가뒀던 사람들[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8월 6일 23시 39분


코멘트

<71> 창문을 보러 갔다

이탈리아 피렌체 산마르코 수도원 내 작은 방을 열자 화가이자 수도사였던 프라 안젤리코(1387∼1455)의 벽화와 작은 창문이 
보인다. 그림과 창문은 세속과 단절돼 고독한 삶을 견뎌야 하는 수도사들에게 한 줄기 희망이 되었다. 김영민 교수 제공
이탈리아 피렌체 산마르코 수도원 내 작은 방을 열자 화가이자 수도사였던 프라 안젤리코(1387∼1455)의 벽화와 작은 창문이 보인다. 그림과 창문은 세속과 단절돼 고독한 삶을 견뎌야 하는 수도사들에게 한 줄기 희망이 되었다. 김영민 교수 제공
이 더운 여름, 이탈리아의 오래된 도시 피렌체에 도착했다. 학생들과 오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제국의 주변을 둘러보기로 약속했었다. 제국의 주변에 있었지만 조공국이 되지 않으려 몸부림친 국가들을 살펴보기로 약속했었다. 유럽 중세 및 르네상스 시기 도시국가들의 흔적을 답사하기로 약속했었다. 그 도시들의 예술적 성취와 정치적 부침과 종교적 구원의 흔적을 살펴보기로 했었다. 우리는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시에나를 거쳐 페라라, 만토바, 베로나, 트렌토, 팔마노바, 그리고 트리에스테를 둘러보기로 했었다.

학생들을 만나기 전에 내가 홀로 피렌체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은 단 하루. 이 하루 동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서양미술사를 대표하는 명화와 조각들로 가득한 우피치 미술관에 갈 것인가, 다비드상을 보기 위해 아카데미아에 갈 것인가, 건축가 부르넬레스키의 돔으로 유명한 대성당에 갈 것인가, 해 질 무렵 베키오 다리를 건너갈 것인가. 나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다. 나는 산마르코 수도원에 갈 것이다.

피렌체의 여름은 덥다. 늦잠을 자면 이미 그날의 가장 좋은 시간은 당신을 떠난 뒤다. 이른 아침에 움직여야 한다. 아무리 더운 이탈리아 여름이라 해도 밤에는 온도가 꽤 떨어지기에 이른 아침이라면 누구나 황금 같은 시간을 누릴 수 있다. 일찍 일어나 밖으로 나서라. 살갗에 닿아도 좋을 선선한 공기와 나직한 목소리라도 좋을 고요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그 시공을 통과하여 마침내 산마르코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사람은 별로 없다. 나는 이곳에 사람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사람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공간을 만나러 왔다. 어떤 특별한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수도원이라는 공간을 느끼러 왔다. 자청해서 수도원에 들어와 살았던 사람들. 한 걸음 더 세속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던 사람들. 그들이 고적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영위했던 곳. 수도원은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가두는 역설적인 공간이다. 그러한 수도자의 열망이 극단화된 공간이 바로 봉쇄수도원이다. 우리나라에도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수녀원’과 같은 봉쇄수도원들이 있다. 봉쇄수도원에 자신을 자발적으로 가둔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고, 기도와 노동으로 나날을 보낸다. 과연 견딜 수 있을까. 그러나 놀랍게도 어떤 사람들은 자유로워지기 위해 자신을 가두는 역설을 기꺼이 행한다. 가두어야 자유를 더 절실하게 바라게 된다.

산마르코 수도원 복도 양쪽으로 수도사들이 머물렀던 작은 방들이 이어지고 있다(왼쪽 사진). 수도원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면 프라 안젤리코의 역작 ‘수태고지’(1435년경)를 만날 수 있다. 김영민 교수 제공
산마르코 수도원 복도 양쪽으로 수도사들이 머물렀던 작은 방들이 이어지고 있다(왼쪽 사진). 수도원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면 프라 안젤리코의 역작 ‘수태고지’(1435년경)를 만날 수 있다. 김영민 교수 제공
산마르코 수도원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면, 계단 끝에 프라 안젤리코의 걸작 ‘수태고지’(受胎告知·마리아가 신의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는 고지를 천사로부터 받는 그림)가 내방자를 맞는다.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은, 르네상스 시기의 수도자이자 화가였던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을 보며, 자신들에게도 올지 모르는 어떤 고지(告知)를 상상할지 모른다. 마침내 2층에 올라서면, 어두운 복도에 줄을 잇고 있는 수도사들의 작은 방들을 볼 수 있다. 마치 감옥처럼 긴 복도가 침묵 속에 작은 방들을 감시하고 있다. 그 컴컴한 복도를 천천히 지나며 그 작은 방들을 하나하나 일일이 들여다본다. 모든 방에는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 한 점과 창문 하나가 있다.

방 밖을 절실하게 꿈꾸기 위해 방의 안이 필요하다. 방 안의 그림과 창문은, 그 방 아닌 곳을 보여주기 위해 거기에 존재한다. 이곳 아닌 다른 곳을 느끼기 위하여 사람들은 그림을 걸고, 창문을 연다. 창문과 그림은 당장의 절망과 권태에도 불구하고 존재할 또 다른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 닫힌 방이 전부이고 다른 가능성은 전혀 없다면, 사람들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방 안에 걸려 있는 그림과 창문은 방 안에 홀로 있는 고단한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

수도원 창문들을 바라보면서, 여러 장소의 창문을 떠올린다. 거실의 창문, 기차의 창문, 감옥의 창문, 창호 가게의 창문, 마음의 창문. 창문 없는 곳도 떠올린다. 좁은 고시실, 땅속에 묻힌 관, 열리지 않는 금고, 과묵한 돌덩이, 꽉 다문 마음, 창 없는 우주.

창문은 희망이되 간신히 존재하는 희망이다. ‘기회의 창’(Window of opportunity)이라는 영어 표현이 있다. 그것은 무엇을 하기 위한 기회가 제한된 시간 내에 있음을 뜻한다. 기회는 언제나 거기 그대로 있지 않다. 꾸물거리면 기회의 창은 조만간 닫히고 말 것이다. 그처럼 간신히 잠시 존재하는 기회와 희망을 애써 모색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인간의 비참 앞에서 애써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고민 끝에 화폭에 창문을 기어이 그려 넣기로 결심한 화가들이다.

화가들은 고민한다. 창문을 그릴 것인가, 말 것인가. 창문을 그린다는 것은, 어둡고 닫힌 현실만을 그리는 일과 다르다. 밝게 빛나기만 하는 미래를 묘사하는 일과도 다르다. 어두운 방에서 밝은 곳을 보며 서성이는 인간의 조건을 그린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2023년 더운 여름, 산마르코 수도원에 창문을 보러 갔다. 이제 그곳에 사는 사람은 없다. 그 빈방 속 창문을 오랫동안 응시하다 돌아왔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이탈리아#피렌체 산마르코 수도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