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장신구 쏟아진 무덤… 주인은 신라 공주인가[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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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신라는 흔히 ‘눈부신 황금의 나라’로 불린다. 신라에서 황금이 많이 난다는 옛 기록과 더불어 경주 분지 곳곳에 분포하는 거대 무덤 속에서 화려한 황금 유물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신라 고분에서 발굴된 귀금속 세공품 가운데 9건이 국보, 20건이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대부분이 금관총, 황남대총, 천마총, 서봉총, 금령총 등 유명한 신라 왕족 무덤 출토품이다.

20건의 보물이 어디서 출토되었는지 자세히 살펴보다 보면 3건의 경우 출토지가 조금은 애매하게 처리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1933년 경주 노서리(현 노서동)의 신라 무덤에서 함께 출토되었다고 한다. 보물을 3건이나 토해낸 이 무덤은 왜 아직도 세상에 제대로 자신의 이름을 드날리지 못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이 무덤에 묻힌 인물은 언제쯤 세상을 뜬 누구이고, 3건의 보물은 어떤 가치를 지녔길래 ‘대한민국’ 보물의 지위를 얻었을까.

호박씨 뿌리다 발견한 보물들
1933년 4월 3일, 경주 노서리 215번지에 살던 김덕언이 자신의 집 토담을 따라가며 호박씨를 뿌리려고 땅을 파던 중 돌이 여기저기서 나오자 차례로 들어냈다. 그러다가 그는 마치 태아처럼 생긴 곡옥(曲玉) 하나를 발견하자 호기심에 더 파내려갔고 자신의 키 정도의 깊이에서 여러 점의 유물을 찾아냈다.

뜻하지 않은 발견에 고민하던 그는 이틀 후 경주경찰서로 가서 금귀걸이 1짝, 은팔찌 1쌍, 금반지와 은반지 각 1개, 금구슬 33개와 곡옥 4개를 건넸다. 경주경찰서는 관련 내용을 조선총독부에 보고했고, 총독부는 조선고적연구회 조수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를 현지로 파견했다.

경찰서에서 유물을 유심히 살펴보던 아리미쓰는 한 쌍이어야 할 금귀걸이가 1짝만 있는 데 의문을 품고 현장을 찾았는데, 그곳이 1920년대에 발굴된 금관총 및 금령총과 지근거리임을 알고는 발굴조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조사는 4월 12일 시작해 8일 동안 신속하게 이뤄졌다.

경주 노서리 고분에서 발굴한 신라 금팔찌(보물 454호).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돌기가 장식되어 있고 앞뒤 면에는 용 네 마리가 
조각되어 있다. 신라 팔찌 가운데 가장 화려하다. 지름 8.3cm. 위 사진은 팔찌의 윗부분을 확대한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경주 노서리 고분에서 발굴한 신라 금팔찌(보물 454호).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돌기가 장식되어 있고 앞뒤 면에는 용 네 마리가 조각되어 있다. 신라 팔찌 가운데 가장 화려하다. 지름 8.3cm. 위 사진은 팔찌의 윗부분을 확대한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아리미쓰는 조심스레 목관 내부의 흙을 제거하다가 마침내 경찰서에서 보았던 것과 흡사한 금귀걸이 1짝을 비롯해 다수의 황금 장신구를 찾아냈다. 특히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유려한 용무늬가 조각된 금팔찌 1쌍으로, 지금까지도 신라 최고의 팔찌로 손꼽히는 명품이다.

일본에 반출됐다 30여 년 만에 귀국
노서리 215번지 소재 신라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그제야 본래의 온전한 모습을 되찾은 듯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김덕언이 신고한 유물은 경찰서를 거쳐 총독부 박물관으로 넘겨졌지만, 아리미쓰가 발굴한 유물은 여기서 빠졌다. 1934년 9월 조선고적연구회 이사장이자 조선총독부 2인자였던 정무총감 이마이다 기요노리(今井田淸德)가 이 유물을 도쿄제실박물관(현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한 것이다. 이 결정으로 인해 같은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절반이 한꺼번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이후 이 유물들은 30년 이상 ‘타향살이’를 하다가 귀국길에 올랐다. 1960년대 초반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사전협의 과정에서 우리 정부는 오구라 컬렉션 등 일본으로 반출된 문화재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65년 한일 양국은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에 합의했고 그것에 근거해 이듬해부터 반출된 유물 일부를 넘겨받았다. 이때 반환된 문화재에 노서리 215번지 고분 출토품이 포함됐다.

신라 황금문화의 최전성기에 제작된 노서리 출토 황금귀걸이(보물 455호·왼쪽 사진)와 신라 6세기를 대표하는 금목걸이(보물 456호). 귀걸이 1짝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30여 년 만에 환수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신라 황금문화의 최전성기에 제작된 노서리 출토 황금귀걸이(보물 455호·왼쪽 사진)와 신라 6세기를 대표하는 금목걸이(보물 456호). 귀걸이 1짝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30여 년 만에 환수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금귀걸이와 금목걸이는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유물과 합쳐져 비로소 온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문화재위원회는 노서리 215번지 출토 유물 가운데 금팔찌, 금귀걸이, 금목걸이가 6세기 신라 황금문화를 대표하는 수작(秀作)이라는 점을 들어 각각 보물로 지정했다. 그런데 금귀걸이는 이후 행정적 착오로 인하여 몇 년 동안 보물 지정이 해제되었다가 지금은 다시 보물의 지위를 회복했다.

발굴 90년 지나도 묘 주인은 수수께끼
광복 후 국립박물관은 경주의 신라 무덤 하나를 발굴하기로 했다. 김재원 관장은 일제 패망 후 출국금지 상태로 서울에 머물며 박물관 일을 돕던 아리미쓰에게 발굴 대상지 추천을 요청했다. 아리미쓰는 과거 자신이 팠던 노서리 215번지 고분에 연접된 ‘노서동 140호분’을 추천했다.

이 무덤에서는 당초 기대했던 금관은 나오지 않았지만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그릇, 즉 청동호우(靑銅壺杅)가 출토됐고 조사단은 이 무덤에 호우총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결국 노서리 215번지 고분은 호우총 발굴의 도화선이 된 셈이다.

발굴 결과 노서리 215번지 고분이 먼저 축조된 다음 큰 시차 없이 호우총이 그에 덧대어 만들어졌음이 밝혀졌다. 이러한 양상으로 본다면 두 무덤에 묻힌 인물은 가족일 공산이 크다. 출토 유물의 구성으로 볼 때 호우총에는 남성, 노서리 215번지 고분에는 여성이 묻힌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다. 학계에선 호우총의 축조 시점을 6세기 전반의 늦은 시기로, 그곳에 묻힌 인물을 눌지왕의 아우인 복호(卜好)의 후손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그보다 조금 이른 시점에 세상을 뜬 여성은 누굴까. 더 이상의 구체적 추정은 어려우나 그녀가 지닌 금세공품 대부분이 신라 왕의 소유물에 필적하거나 그 이상이라는 점, 신라 왕족들 사이에서 종종 이루어진 근친혼 풍습 등을 아울러 고려한다면 그녀는 신라 공주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노서리 215번지 고분은 발굴 90주년을 맞이한 지금까지도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다. 다만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들만이 6세기 신라 황금문화의 탁월함을 웅변할 뿐이다. 장차 활발한 연구를 통해 이 무덤이 품고 있는 신라사의 다양한 비밀을 풀어낼 수 있기를, 재발굴을 통해 이 무덤의 정확한 구조를 밝히고 과거 미처 확인하지 못한 유물까지도 온전히 수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지금의 애매한 이름을 벗어던지고 호우총이나 천마총처럼 멋진 새 이름으로 불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황금 장신구#보물#묘 주인은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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