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철희]“말폭탄도 연애편지도 김정은에겐 먹혔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1일 21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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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오 “한 치 양보 없이 美 안전 지켰다”
트럼프식 널뛰기 대북정책이 남긴 것은 뭔가

이철희 논설위원
이철희 논설위원
회고록은 역사가 아니다. 역사로 만들기 위한 주관적 노력일 뿐이다. 특히나 정치인, 여전히 큰 야심을 품고 있는 인물의 회고록은 자기 자랑과 변명으로 덧칠돼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읽을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직접 체험한 사건, 그 뒷얘기, 나아가 사후 평가는 어디서도 기대하기 어려운 쏠쏠한 재미를 준다.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국 국무장관이 최근 낸 회고록 ‘한 치도 물러서지 말라(Never Give an Inch)’도 꽤나 흥미롭다. 폼페이오의 책 출간은 내년 대선의 공화당 경선에 나서기 위한 첫걸음이라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그의 회고록은 여느 정치인이 선거 전에 내놓는 책과 달리 몹시 사납고 공격적이다. 자신이야말로 위험을 무릅쓴 극한 전사이자 냉혈한 현실주의자로서 ‘아메리카 퍼스트’의 구현자임을 내세우려는 의도가 곳곳에서 묻어난다.

그래선지 철저히 당파적, 정쟁적이다. 민주당 인사는 물론 안보전문가, 언론인에게까지 거침없는 독설을 쏟아낸다. 함께 일했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인사들, 특히 공화당 경선의 잠재적 경쟁자들도 험악하게 깎아내린다. 반면 트럼프는 시종 변호한다. 자신은 트럼프의 총아(寵兒)로서 충직한 실행자였다고 자부한다. 트럼프가 부추긴 의사당 폭동 같은 불편한 얘기는 가급적 피한다. 과거 ‘트럼프 엉덩이만 쫓는 열추적 미사일’이라던 놀림을 상기시키는 이유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도 폼페이오는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한다. 우선 트럼프가 김정은을 향해 날린 “화염과 분노” “완전 파괴” 같은 말폭탄이 ‘역대 어느 행정부도 하지 못한 멋진 전략’이었다고 평가했다. 김정은을 몇 달간 조용하게 만들었고 이후 북한이 쏜 미사일은 단 한 발이었다고 썼다. 하지만 그 한 발이 미국 전역을 위협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었고 그 직후 김정은이 ‘핵무장 완성’을 선언했다는 사실은 빼놓았다.

나아가 갑작스러운 대화 국면 전환도 외교의 창을 열어둔 결과라고 했다. 정상회담 약속만으로 인질 3명을 귀환시켰고, 싱가포르 회담을 통해선 6·25전쟁 전사자 유해 송환과 핵·장거리미사일 시험 중단을 받아냈다는 것이다. 비록 대규모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대가로 줬지만 “홈런은 아닐지라도 가치 있는 거래였다”고 주장했다.

반면 하노이 회담 결렬에 대해선 “나쁜 양보도, 나쁜 타협도, 나쁜 거래도 하지 않은 옳은 일이었다”고 강조했다. 이후에도 트럼프와 김정은의 판문점 회동, 지속적인 ‘연애편지’ 교환을 통해 북한 도발을 막는 효과를 거뒀다며 이렇게 적었다. “트럼프 임기 말까지 북한은 핵실험도, 장거리미사일 발사도 하지 않았다. 미국을 안전하게 지킨 중요한 성과였다.”

극과 극을 널뛰듯 오간 트럼프식 대북 접근법은 전례 없는 실험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과연 성공적이었을까. 일시적 책략의 승리였을지는 모르나 북한에 시간만 벌어준 것은 아닌가. 트럼프가 떠난 뒤 곧바로 드러난 사실은 북한이 더욱 위험해지고 미국도 한층 불안해졌다는 것이다. 여지없이 북핵을 이고 살게 된 한국의 처지는 말할 것도 없다.

북한은 당장 폼페이오 회고록을 꼼꼼히 검토할 것이다. 폼페이오가 ‘그렇게 재미 좀 봤다’며 드러낸 미국식 셈법, 나아가 북한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과 비하에 김정은은 이를 갈고 있을지 모른다. 미완(未完)으로 끝난 협상의 민감한 내용까지 들춰낸 그의 기록은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실패의 자인(自認)이 아닐 수 없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대북 정책#폼페이오#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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