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그룹과 ‘전쟁의 외주화’[글로벌 이슈/하정민]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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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프리카 말리에서 활동 중인 러시아 민간군사회사 바그너그룹의 용병 모습을 올 4월 프랑스군이 공개한 사진. 바그너그룹은 과거 
프랑스 식민지였고 독립 후 줄곧 내전에 시달린 말리에서 현지 친러 정권과 결탁해 민간인 학살 등을 자행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AP 뉴시스
서아프리카 말리에서 활동 중인 러시아 민간군사회사 바그너그룹의 용병 모습을 올 4월 프랑스군이 공개한 사진. 바그너그룹은 과거 프랑스 식민지였고 독립 후 줄곧 내전에 시달린 말리에서 현지 친러 정권과 결탁해 민간인 학살 등을 자행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AP 뉴시스
하정민 국제부 차장
하정민 국제부 차장
2007년 9월 이라크 바그다드 니수르 광장. 미국 민간 군사기업(PMC·Private Military Company) ‘블랙워터’ 직원들이 총기를 난사해 민간인 17명이 숨졌다. 비판이 들끓자 주범들은 미 법정에 섰고 회사는 수차례 이름을 바꿨다. 이때만 해도 PMC 업계의 주 업무는 전투 가담이 아닌 경호, 경비 수준이었다.

15년이 흐른 지금 PMC와 정규군의 구분은 모호해졌다. 독일 정보당국이 우크라이나 부차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주도했다고 명시한 러시아 PMC ‘바그너그룹’이 대표적이다. 북한이 우크라이나전에 쓰일 로켓과 미사일 등을 이들에게 인도했으며 우크라이나에 5만 명의 바그너그룹 용병이 있다는 미 백악관의 22일 발표는 이 회사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사병(私兵) 수준을 넘어 러시아군의 중추가 됐음을 짐작하게 한다.

21일 미 외교매체 포린폴리시(FP) 또한 예브게니 프리고진 바그너그룹 창업자가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바그너그룹이 S-300 미사일, 수호이(Su)-25 전투기 같은 최신 무기에 러시아군보다 더 쉽게 접근한다고도 전했다.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서 고전을 거듭하는 정규군 대신 바그너그룹에 더 의존한다는 백악관 발표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피’로 ‘돈’을 버는 PMC가 활개를 칠수록 세계는 더 위험하고 무자비한 곳이 된다. PMC는 극한의 효율을 추구한다. 바그너그룹 용병의 대부분은 재소자 출신이다. 살인자,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및 C형 간염 환자도 받는다. 모두 모집이 쉽고 몸값도 싸다. 니수르 광장의 민간인 학살은 고작 차가 밀린다는 이유로 자행됐다. 교전 수칙과 인명 중시, 군법 회의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PMC를 부리는 각국 정부도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들이 전쟁 범죄를 저질러도 “일개 PMC의 독단 행동”이라며 꼬리 자르기에 급급하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은 퇴임을 한 달 앞둔 2020년 12월 종신형 등을 선고받은 블랙워터 용병 4명을 사면했다. 러시아 역시 정부와 바그너그룹의 연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2014년 바그너그룹 창설 후 자신이 창립자란 사실조차 부인하던 프리고진은 올 9월에야 이를 시인했다. 바그너그룹에 대한 탐사 보도를 했던 러시아 언론인 막심 보로딘은 의문의 추락으로 숨졌다.

세계 곳곳의 분쟁과 권위주의 통치는 PMC가 몸집을 키울 토양을 제공한다. 블랙워터 창업자 에릭 프린스는 민간인 학살에 따른 비판 여론으로 블랙워터를 떠났다. 이후 홍콩에 프런티어서비스그룹이란 회사를 세우고 2019년 중국과 신장위구르에 군사훈련 기지를 세우는 계약을 맺었다. 신장위구르 내 소수민족 탄압에 쓰일 가능성이 높다. 이 회사는 미얀마 군부와도 협력한다. 정규군이 부실하고 내전이 잦은 아프리카 저개발국 또한 PMC에 의존한다. 바그너그룹은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말리, 수단 등에서 군경을 대신해 치안을 유지한다.

주요국의 군비 경쟁도 빼놓을 수 없다. 2023 회계연도에 8580억 달러(약 1115조 원)의 국방예산을 확정한 미국은 곧 ‘1조 달러 국방예산 시대’를 맞는다. 중국 또한 미국에 뒤지지 않겠다는 뜻을 천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숨죽였던 일본과 독일도 군사대국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이때 국내외 비판 여론을 쉽게 무마할 수 있고 의회의 견제도 없는 PMC의 활용은 정규군을 늘리는 것보다 빠르고 간편한 길이다.

각국 정부와 권위주의 지도자가 PMC를 곁에 둘수록 분쟁이 더 늘고 후폭풍도 커지는 악순환이 나타난다. 살인 기계나 다름없는 이들의 폭주를 제어할 길이 현실적으로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전쟁의 ‘외주화’와 ‘민영화’가 가속화할수록 부차와 니수르 광장의 참극 또한 되풀이될 것이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바그너그룹#전쟁의 외주화#p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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