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황금 귀고리, 삼국시대 권력 읽는 단서[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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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1000여 개의 황금 귀걸이는 당시 권력의 탄생과 주변국과의 관계 등 고대사 해명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경기 김포에서 출토된 마한의 3세기대 금 귀걸이. 만주 쑹화강 일원 부여에서 제작돼 마한으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삼국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1000여 개의 황금 귀걸이는 당시 권력의 탄생과 주변국과의 관계 등 고대사 해명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경기 김포에서 출토된 마한의 3세기대 금 귀걸이. 만주 쑹화강 일원 부여에서 제작돼 마한으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며칠 전 경북 경주 황남동 120호분 발굴 성과가 언론에 공개됐다. 5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이 무덤에서는 금 귀걸이, 허리띠 등이 정연한 모습으로 출토됐다. 학계에선 귀걸이의 맨 위쪽 고리가 가늘다는 점에 주목해 무덤 주인공을 신라 귀족 남성으로 추정했다. 이처럼 삼국시대 무덤에서 흔히 출토되는 금 귀걸이는 무덤 주인공의 성별을 파악하거나 사회적 지위를 추정할 때 주요 근거가 된다.

그에 더하여 지난 한 세기 동안 삼국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1000여 점의 금 귀걸이는 특정 시기의 패션 아이템으로서 당대인의 미감을 잘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제작과 소유를 통해 권력의 탄생, 외교 관계의 추이까지 보여준다. 한국 고대사 해명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 대표 귀걸이로는 어떤 것이 있고, 또 그것을 통해 밝혀진 새로운 사실은 무엇일까.
김포서 나온 3세기 부여 금 귀걸이
2009년 8월 경기 김포 운양동의 3세기대 마한 유력자 무덤에서 마치 손톱처럼 생긴 황금장식이 출토됐다. 그 시기의 마한묘에서 황금장식이 출토된 사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그러한 형태의 장식은 처음으로 드러난 것이라서 조사원들은 그것의 용도 해명에 어려움을 겪었다.

한 달 뒤 현장을 찾은 전문가들은 그것이 만주 쑹화(松花)강 유역에서 종종 출토되는 부여 귀걸이와 매우 유사하므로 귀걸이로 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그럴 경우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금 귀걸이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그 내용이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되자 일부 학자들은 이 금제품이 귀걸이가 아니라 손톱에 덧씌운 장식일 것이라는 반론을 폈다.

수년간의 논쟁을 거쳐 현재는 “3세기경 부여에서 만들어져 마한으로 전해진 귀걸이로, 마한과 부여 사이의 교류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설명하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또한 근래 한반도 중부 지역의 마한 시기 유적에서 부여계 유물들이 속속 발견됨에 따라 마한 지역으로 파급된 부여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있다.
황금 귀걸이는 무령왕의 애착 장식품?
충남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의 금 귀걸이. 귀걸이에 수리한 흔적이 남아 있어 생전 즐겨 사용하던 애용품임을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충남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의 금 귀걸이. 귀걸이에 수리한 흔적이 남아 있어 생전 즐겨 사용하던 애용품임을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삼국시대 귀걸이 가운데 국보는 네 쌍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세 쌍이 1971년 충남 공주에서 우연히 발굴된 백제 무령왕릉 출토품이다. 523년 세상을 뜬 왕의 귀걸이가 한 쌍, 526년 세상을 뜬 왕비의 귀걸이가 두 쌍이다. 이 귀걸이들은 주인이 밝혀진 데다가 여타 귀걸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공예기술이 구사되었기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왕의 귀걸이는 신라적 색채를 일부 수용하여 백제 공방에서 제작된 것이며, 맨 아래쪽에 하트 모양 장식이 달려 있다. 그런데 한 짝에 수리 흔적이 남아 있어 이 귀걸이가 장례용품이 아니라 왕의 생전 ‘애착’ 장신구임을 알 수 있다. 왕비의 귀걸이는 한성기 이래의 귀걸이 양식을 계승해 만든 것이며 유리구슬이 끼워져 있어 이채롭다.

이 세 쌍의 귀걸이는 백제 금속공예의 정수일 뿐만 아니라 백제의 대외 교류 양상을 잘 보여주는 자료라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즉, 왕의 귀걸이와 유사한 것이 일본 구마모토현에서, 왕비의 귀걸이와 유사한 것이 일본 시가현과 경남 합천에서 각각 출토된 바 있다. 모두 백제 왕실공방 소속 최고의 장인이 만든 작품이며, 외교 관계에 수반해 정치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대가야와 왜로 전해진 사례이다.

석실 속에서 원형 지켜, 국보 지정되기도
경북 경주 보문동 합장분 석실묘에서 출토된 신라의 금 귀걸이.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경북 경주 보문동 합장분 석실묘에서 출토된 신라의 금 귀걸이.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백제에 무령왕 부부의 귀걸이가 있다면 신라에는 경주 보문동 합장분 출토 국보 귀걸이가 있다. 1915년 7월 도쿄대 교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일행이 발굴한 이 무덤에는 적석목곽묘와 석실묘가 하나씩 들어있었다. 그 가운데 국보 귀걸이는 석실묘에서 출토됐다.

세키노 일행이 무덤 벽을 뚫고 내부로 진입했을 때 바닥 곳곳에 무덤 주인공의 뼛조각들과 함께 목관 손잡이, 금동 및 은팔찌가 있었고 석실로 진입할 때 무너져 내린 흙무더기 아래에서 금 귀걸이 한 쌍이 발견되었다. 귀걸이는 표면에 금실과 금 알갱이를 가득 붙여 화려하게 꾸민 명품이었다. 신라 귀걸이는 적석목곽묘에서 주로 출토되다 보니 돌무더기가 무너져 내리면서 대부분 찌그러진 모습을 띠고 있음에 비해 이 귀걸이는 석실묘에서 출토되었기에 완벽한 모습으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보문동 합장분은 6세기 중엽 경주에 살던 신라 사람들이 적석목곽묘를 대신하여 석실묘를 새롭게 쓰기 시작하던 시점에 만들어진 무덤이다. 그런데 보문동 국보 귀걸이에 후속하는 금 귀걸이가 아직 신라 유적에서 발굴된 바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불교가 공인되는 등 거대한 사회 변화의 흐름 속에서 황금 장신구의 제작이 급감하였거나 율령 반포 이후 국가 차원에서 귀금속 사용을 통제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회 지배층의 표상, 황금 장신구
이처럼 우리 역사에서 삼국시대 사람들은 황금 장신구, 특히 금 귀걸이를 선호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시대의 거대 무덤에서 출토되는 황금 장신구는 무덤 주인공의 사회적 지위를 표상하는 바로미터였을 공산이 크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배층의 일원임을 가시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금 귀걸이를 얻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시기의 금 귀걸이는 대부분 각 나라의 왕도 소재 관영공방에서 최고의 장인들이 만든 것이며, 그것은 국내를 넘어 정치적으로 밀접하였던 주변국으로도 전해졌다. 대체로 고구려에서 신라로, 백제에서 가야와 왜로 파급되는 양상인데 이는 역사 기록에 보이는 국제관계의 추이와 부합한다.

근래 삼국시대 금 귀걸이에 대한 연구가 정밀해지고 있다. 귀걸이의 재질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고, 각 나라의 귀걸이 형태를 비교 분석하는 연구도 많아지고 있다. 그에 따라 머지않은 장래에 금 귀걸이에 스민 고대사의 수수께끼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해명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된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황금 귀걸이#황금 장신구#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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