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신성 비석에 담긴 ‘신라판 책임시공제’[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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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신성의 모습. 신성의 둘레는 2854보에 이르는데, 맹서 등을 새긴 비석이 약 200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경주 남산신성의 모습. 신성의 둘레는 2854보에 이르는데, 맹서 등을 새긴 비석이 약 200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우리 역사상의 여러 고도 가운데 경주는 왕도로 쓰인 기간으로 보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단 한 번의 천도도 없이 천년 가까이 경주에 도읍했다고 한다. 고대의 전쟁에서 왕도를 잃는다는 것은 곧 나라의 패망을 뜻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일이었기에 신라는 왕도를 방어하기 위해 2중 3중의 방어시설을 구축했다.

그 가운데 진평왕 때 쌓은 남산신성(南山新城)은 중요도가 높은 핵심 거점이었다. 이 성은 왕의 거소인 월성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산성일 뿐만 아니라 규모 또한 방대하다. 요즘으로 치면 수도방위사령부에 해당한다. 이 성의 경우 다른 성들과 달리 언제, 누가, 어떤 방식으로 쌓았는지를 알려주는 비석이 10기(基)나 발견된 바 있어 학계의 주목을 끌어왔다. 이 비석들에는 신라사의 비밀을 밝혀줄 어떤 단서들이 새겨져 있을까.

“3년 안에 성이 무너지면…”
경주 남산신성에선 지금까지 축성 날짜와 맹서 등을 새긴 비석 10기가 발견됐다. ‘3년 안에 파손될 경우 벌을 받겠다’는 맹서이니
 일종의 책임시공제가 신라 때 있었던 것이다. 왼쪽 사진은 1934년 처음으로 발견된 남산신성비. 자연석에 세로로 축조에 참여한 
인물의 이름, 출신지 등 개인 정보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 사진은 사천왕사지 주변 민가에서 발견된 제3비.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경주 남산신성에선 지금까지 축성 날짜와 맹서 등을 새긴 비석 10기가 발견됐다. ‘3년 안에 파손될 경우 벌을 받겠다’는 맹서이니 일종의 책임시공제가 신라 때 있었던 것이다. 왼쪽 사진은 1934년 처음으로 발견된 남산신성비. 자연석에 세로로 축조에 참여한 인물의 이름, 출신지 등 개인 정보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 사진은 사천왕사지 주변 민가에서 발견된 제3비.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1934년 10월 경주박물관장 오사카 긴타로와 경주고적보존회 촉탁 최남주는 경주 남산 주변 민가 앞길에서 비석 하나를 우연히 발견했다. 비석에는 “신해년 2월 26일에 남산신성을 쌓는데, 만약 쌓은 지 3년 이내에 성이 무너지면 법에 따라 죄를 다스릴 것이라는 명을 듣고 맹서(盟誓)한다”는 흥미로운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 비석은 곧바로 한 잡지에 소개되었고 신라의 중요 금석문으로 자리매김했다.

1956년 남산 서쪽 기슭에서 남산신성비 조각 하나가 발견된 데 이어 1960년에는 그 주변에서 그것의 나머지 조각이 발견되면서 남산신성비가 복수로 세워졌음이 밝혀졌다. 이후 2000년까지 몇 년에 하나씩 비석이 차례로 발견되어 남산신성비는 10기로 늘었다. 그 가운데 1972년에 발견된 제5비는 민가의 구들장으로 쓰였던 것이 주택 개축 과정에서 드러나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1994년 발견된 제9비의 경우 원위치에서 파내져 다른 곳으로 옮겨졌지만 경주박물관 박방룡 학예사의 노력으로 그것이 원래 성벽 안쪽에 세워졌던 것임이 밝혀졌다.

일제 이후 전국 각지의 읍성과 산성 성돌은 온돌을 비롯한 각종 건축부재로 전용되었는데, 남산신성의 성돌 역시 그 무렵 성밖으로 다수 반출되었다. 그 성돌 무리에 남산신성비 몇 점도 포함된 것이다.
축성 날짜와 맹서 빼곡히 새겨
5, 6세기의 신라 비석 가운데 북한산 진흥왕순수비처럼 매끈하게 다듬은 돌에 비문을 새긴 것도 있지만, 남산신성비를 위시한 다수는 자연석재의 편평한 면에 글귀가 새겨진 것이다. 10기의 남산신성비를 살펴보면 새겨진 글귀는 비석마다 다르지만 비문 구성의 큰 틀은 같다.

제2비만이 아대혜촌이라는 마을 이름으로 시작하고 다른 비석은 신해년 2월 26일에 쌓았다는 축성 날짜가 맨 앞에 나온다. 이어 정해진 법식에 따라 성을 쌓고 만약 3년 이내에 성이 무너져 파손될 경우 벌을 받겠다는 맹서가 기록되어 있다. 제2비도 마을 이름 뒤에는 축성 날짜와 맹서의 글귀가 동일하게 새겨져 있다.

비문에 등장하는 신해년이 591년일 것이라는 점에는 이론이 없다. 삼국사기의 진평왕 재위 13년에 “7월 남산성(南山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2854보(步)이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해의 간지가 신해년이기 때문이다. 2월 26일이 공사를 시작한 날짜인지, 준공한 날짜인지 논란이 있다. 혹자는 2월 26일에 공사를 시작해 7월에 준공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맹서문 다음에는 구간별로 시공에 참여한 책임자급 인물의 명단과 그 집단이 시공한 구간의 길이가 새겨져 있다. 명단 속 인물들 가운데는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 현지 출신 하급 관인, 축성에 필요한 기술자가 포함되며 그들의 관직, 출신지, 이름 등의 ‘개인 정보’가 고스란히 공개되는 방식이므로 공사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효과가 컸으리라 짐작된다. 공사 담당 구간의 길이는 비석마다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지형 조건에 따라 담당 구간의 길이를 조정하였음에 기인하는 것 같다.
약 200개의 ‘책임시공 비석’ 추정
진평왕은 56명의 신라 국왕 가운데 시조 혁거세왕을 제외하면 가장 오랜 기간에 해당하는 53년간 재위하였다. 그는 진흥왕의 태자였던 동륜(銅輪)의 장자이며, 숙부인 진지왕이 폐위된 후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내치와 외치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선대의 진흥왕과 후대의 무열왕에 가려져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인물이다.

그는 많은 부서를 설치하여 국정을 직접 챙겼고 중국 왕조들과의 외교관계 수립 및 개선에 노력했다. 그는 군사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여 591년 남산신성을 쌓았고 2년 후에는 명활산성과 서형산성을 고쳐 쌓았다. 603년에는 고구려군이 북한산성을 공격하자 직접 군사 1만을 이끌고 나아가 고구려군을 패퇴시키기도 했다.

그의 치세에 남산신성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시도한 구간별 ‘책임시공제’가 신라의 여타 성 축조에도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방식은 단기간에 산성을 쌓을 때 효과적이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당시의 보편적 축성법이었을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의 축성은 지방사회 깊숙이 중앙 권력이 침투하여 요역을 징발하는 시스템과 함께 축성의 세부 공정별 전문 인력이 갖춰져 있었기에 가능했다. 10기의 남산신성비에는 591년 당시 신라가 지닌 집권력과 기술력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이처럼 옛 비석은 역사서에서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 매력이란 바로 ‘날것’, 즉 생생함이다. 비록 글자가 마멸되고 문장이 정치하지 않아 판독이 어렵긴 하지만 비석을 세운 시점의 모습을 잘 보여주며 역사의 여백을 메울 수 있는 단서가 풍부하다. 학계에선 남산신성을 쌓으면서 적어도 200기가량의 비석이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므로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비석이 어딘가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있다. 머지않아 남산신성비 제11비의 발견 소식이 전해져 남산신성 축조의 비밀이 조금 더 밝혀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남산신성#신라판 책임시공제#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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