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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횡설수설/송평인]아니 에르노

입력 2022-10-08 03:00업데이트 2022-10-0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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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여성 작가 아니 에르노가 2008년 ‘Les Ann´ees’를 출간해 프랑스 국내 문학상을 휩쓸 때 파리특파원으로 있었다. 누군가가 이 책이 좋다고 권했고 그때 구입해서 갖고 있다가 2010년 귀국하면서 들고 왔다. 작가가 겪은 크고 작은 사건과 그 단상(斷想)을 무작위로, 다만 연대순으로 나열해 놓은 책이다. 쭉 읽을 필요도 없이 아무 데나 펼쳐 읽어도 좋다. 국내에서는 올 5월 ‘세월’로 번역됐다.

▷프랑스인 친구가 올여름 책을 몇 권 보내줬는데 그중 하나가 에르노의 ‘사건’이다. 책 표지에 ‘최근 인기 있는’이라고 손수 써 놓았다. 이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져 2021년 베네치아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탔다. 그러나 작품 자체는 2000년 출간됐다. ‘최근 인기 있는’이라는 설명은 영화제에서 상을 탄 후 다시 널리 읽히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중에 에르노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에르노는 1940년생으로 프랑스의 신구(新舊) 문화가 충돌하던 1960년대에 20대를 보냈다. 젊은이들은 자유연애에 빠져들었고 그럼에도 낙태가 불법인 사회에서 덜컥 임신하게 된 20대 여학생이 낙태시술을 시도하면서 겪는 심리적 육체적 고통이 ‘사건’의 내용이다. 불법이기 때문에 정보가 차단되고 시술이 비밀리에 행해지기 때문에 원시적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겪는 어려움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낙태천국이라는 한국에서도 활자화되지 못한 얘기를 프랑스 작가의 글로 보는 기분이 묘했다.

▷에르노는 체험한 것만 쓴다는 작가다. 체험을 바탕으로 형상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체험한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쓰는 게 그의 특징이다. 그의 작품은 모두 17권이 번역돼 있는데 2001년 번역된 ‘단순한 열정’ 등 몇 권을 빼고는 대부분 최근 3년간 집중적으로 번역됐다. 자의식이 강한 프랑스 여성이 10대부터 40대까지 겪은, 1950∼1980년대의 오래전 성과 사랑의 얘기가 대부분이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읽히는 측면이 있다.

▷에르노는 일기의 형태로든 뭐로든 기록을 열심히 한 작가인 듯하다. 그런 기록의 나열을 아예 책으로 구성한 것이 ‘세월’이다. ‘세월’은 ‘모든 이미지는 사라질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사라져가는 이미지를 잡으려고 노력한 것이 기록이다. 역사책에 나오는 큰 사건만이 사건이 아니다. 시대의 크고 작은 사건과 그 단상이 모여 시대의 구체적 모습이 드러난다. 그런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역사와 다른 소설의 존재 가치라는 점에서 에르노의 글쓰기는 소설 본연의 의미를 새삼 묻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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