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안 윈터’가 온다 [특파원칼럼/조은아]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7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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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대국도 에너지 구하러 동분서주
‘자원 빈국’ 한국 정부, 힘껏 뛰고 있나

조은아 파리 특파원
조은아 파리 특파원
지난주 프랑스 파리에서 타고 가던 지하철이 갑자기 콩코르드역에서 멈췄다. 순간 모든 객차 불이 꺼지자 승객들은 당황하며 웅성거렸다. 정전인가, 테러라도 터졌나, 불안해하던 찰나 ‘차량을 갈아타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앞서 가던 차량에서 연기가 나 점검이 필요하다는 설명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정전이 되려나 보다”라며 서둘러 전철을 벗어났다. 비슷한 때 들른 파리 한 레스토랑에서도 저녁 영업이 시작되기 직전 전기가 나가 버렸다. 식당 사장은 “미안하지만 오늘 음식을 할 수 없다”며 문을 닫았다.

폭염에 크고 작은 전기 사고가 잇따르자 프랑스인도 에너지의 중요성을 체감하고 있다. 이 와중에 러시아 국영 에너지기업 가스프롬은 11일부터 열흘간 독일을 통해 유럽 국가들로 흐르는 가스를 전체 용량의 40%로 줄이더니, 27일부턴 추가로 20%까지 감축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서방의 제재를 당하자 가스를 틀어쥐고 역공한 셈이다.

이 때문에 유럽에서는 올겨울 ‘러시안 윈터’가 온다는 공포가 커지고 있다. 러시안 윈터는 원래 러시아를 침략한 프랑스 나폴레옹이나 나치 독일 히틀러를 실질적으로 퇴진시킨 러시아 동장군(冬將軍)을 말한다. 요즘에는 러시아가 야기한 유럽의 강추위란 의미로 불린다. 러시아가 가스관을 잠가 올겨울 유럽을 혹독한 추위에 뼈가 시리도록 만들 것이라는 얘기다.

위기감이 고조된 유럽연합(EU)은 회원국들에 ‘가스 소비량을 15%까지 줄이자’고 제안하는 초강수를 뒀다. 유럽 국가들은 EU 제안에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프랑스 정부는 전국 모든 상점에 “에어컨이나 난방을 가동할 때는 꼭 문을 닫고 영업하라”고 통보했다. 이를 어긴 자영업자는 최대 750유로(약 100만 원) 벌금을 내야 한다. 자영업자 사이에선 ‘올겨울 정전이 발생하면 일정 시간대 영업을 중단해야 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가구 소득의 10% 이상을 에너지에 쓰는 ‘에너지 빈곤층’ 비중이 전체 가구의 25%로 급증한 독일의 지방정부는 취약계층을 위한 공동 난방구역을 지정하고 있다. 벌써 마트에는 정전에 대비해 목재나 석탄을 사들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유럽 국가들도 이런 대책이 근본적인 해법이 아니란 것을 안다. 아무리 에너지 소비를 줄여도 한계가 있다. 발 빠른 국가는 장기적으로 에너지 안보를 지키려 중동 아프리카 자원대국에서 천연가스나 이를 대체할 원유 공급을 약속받고 있다.

18일 아랍에미리트(UAE)와 에너지 관련 협의를 이끌어 낸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경유 공급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때 안와르 가르가시 UAE 대통령외교보좌관이 기자들에게 한 말이 예사롭지 않다. “40년간 극동 지역에 석유를 팔아 왔는데 위기 국면인 지금은 석유를 유럽으로 돌리고 있다.” 한국의 5위 원유 수입국 UAE가 아시아로 공급하던 원유를 유럽 국가들로 돌리면 국내 원유 수급이 불안해질 수 있다.

유럽 대국은 오랜 유대를 맺어온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 각종 자원을 사들이고 있어 자원 수급이 비교적 안정적이다. 그런데도 대통령까지 나서 ‘에너지 영업’을 뛰어 자원 대국의 판매망을 바꾼다. 이런 유럽에 비하면 ‘자원 빈국’ 한국은 얼마나 절박하게 에너지난에 대비하고 있을까. 경쟁국의 공격적인 에너지 외교에 밀리지 않도록 우리 정부도 힘써야 할 때다.

조은아 파리 특파원 achim@donga.com
#러시안 윈터#유럽#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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