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줌인]막차가 떠나버린 세상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7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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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스릴러 ‘큐어’ 속 주인공 다카베 겐이치 형사(야쿠쇼 고지)의 모습. 이 영화는 스릴러 거장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
공포 스릴러 ‘큐어’ 속 주인공 다카베 겐이치 형사(야쿠쇼 고지)의 모습. 이 영화는 스릴러 거장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지난해까지 주변 사람들로부터 숱하게 조언을 들었다. 가상화폐 코인 투자와 부동산 투자 막차에 얼른 올라타야 한다고 말이다. 올해부턴 분위기가 또 다르다.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술자리에서 막차를 타야 한다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난 막차 탔지∼.” 값이 오르기 전에 집을 샀다는 친구는 안도했다. 그 말인즉, 누군가는 어디에선가 낙심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젠 막차가 끊긴 걸까? 정말 그렇다면 막차에 간신히 탄 사람조차도 마냥 안도할 순 없다. 막차란 항상 순차적으로 끊기는 법. 취업이든 자가(自家) 마련이든 삶의 지금 목표에 간신히 도달했다고 한들 도착역에서 인생의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는 환승 열차나 버스가 남아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지금 어디에서인가 막차가 끊기고 있다면, 조금 더 갔든 이미 멈췄든 우린 모두 결국 막차가 사라진 세상에 하차하게 될 것이다. 그땐 우린 무엇을 위해 살아가게 될까. 지금까진 다음 차를 타러 가야 한다는 인식과 규범을 따라서 여기까지 왔는데 말이다.

이 질문을 먼저 마주했던 곳이 있다. 버블경제가 끝난 뒤에 끝을 알 수 없는 침체를 통과하고 있던 1990년대 후반 세기말 일본이다. 1997년 일본에서 개봉한 스릴러 영화 ‘큐어’가 비추는 공간이기도 하다. 일본 대중문화 전면 개방 이전에 나온 영화는 국내에선 이달 초 처음으로 정식 개봉했다.

줄거리는 이렇다. 일본 도쿄에서 살인 사건이 연달아 벌어진다. 우연의 일치로 보기엔 잔혹한 수법이 동일하고 범인들도 하나같이 자신이 저지른 범행이라고 자백하며 살해 상황도 또렷하게 기억하며 순순히 진술한다. 그러나 그들은 살인을 저지른 이유에 대해선 횡설수설하며, 추정되는 동기 또한 없다.

사건 담당 다카베 겐이치 형사(야쿠쇼 고지)는 살인을 저지른 이들이 공통적으로 한 사람을 만난 뒤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바로 기억상실에 빠진 최면술사 마미야 구니오(하기와라 마사토)다. 그는 자신이 만난 사람들에게 “당신은 누구지?”라고 물으면서 평온해 보이는 일상 뒤의 무의식을 뒤흔드는 인물이다. 이제 영화를 끌고 가는 것은 다카베 형사와 마미야의 심리 대결이다. 마미야는 다카베 형사의 내면에도 파문을 일으키려 한다. 당신은 누구냐고 끊임없이 되묻는 방식으로.

영화의 핵심은 마미야의 질문에 동요하다가 살인까지 저지르는 사람들이 극히 평범하다는 점이다. 그들은 모두 착실한 시스템의 수호자들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사회적 규범을 따르거나(회사원) 가르치며(교사), 지키지 않으면 처벌하며(경찰), 사람을 살리라는 사명(의사)에 충실해왔다.

마미야가 그들을 만나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만 그 뒤엔 이런 맥락이 있다. 사회적 규범을 지키는 착한 사람이라는 외피를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것은 시스템이 부여한 역할극에 불과하지 않으냐고. 진짜 당신은 어디에 있느냐고.

온갖 욕망을 부추기던 1980년대 버블경제 시기를 거쳐 그저 먹고살 만한 삶 외엔 별다른 선택지가 없고, 사회의 시스템이 더 이상 욕망을 단계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경로를 개인에게 제공할 수 없게 됐을 때 일본은 세기말을 맞았다. 이젠 ‘일탈하지 않는 착한 사람 되기’만이 유일 가치관이 된다.

세상이 우리에게 단계적인 성취 단계를 펼쳐놓든, 일탈 금지만을 유일 가치로 제시하든 모두 체제 안정성으로 욕망을 유도한다는 점에선 본질적으로 같다. 그러나 개개인의 입장에선 막차까지 사라진 세상 쪽에서 받는 질문이 더 무겁다. 삶의 경로를 따라 단계를 하나씩 성취해 나간다는 마취 효과마저 사라졌을 때, 선택지는 체제 안에 계속 남을지 이탈할지로 단순화되니까.

시스템은 정당한가? 그리고 남아 있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건 우리의 일상 속에 이미 잠복해 있는 질문이다. 불쑥 이런 질문이 삶의 어느 순간에 돌출될 때,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체제를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이란 죽거나, 미치거나,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그리는 잔혹한 세계관이다.

영화엔 시종 비관밖에 없고, 그건 냉소와 더불어서 막차가 떠나버린 세계의 중요한 표정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영화가 일깨워주는 건 시스템이란 고작해야 우리에게 복무할 것만을 요구하는 비합리성의 총체라는 점,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삶의 목표를 체제의 명령에 의존하지 않고 그 바깥에서 스스로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시스템의 명령에 착실히 복무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각자 자신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진짜 신념을 들여다보고 체제가 아닌 진짜 자기 삶의 원칙을 정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영화 막바지에 남는다. 그리고 영화는 25년 걸려 그 메시지가 필요한 곳에 정확히 도착한 것처럼 보인다.

막차가 떠나버린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목적지부터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공포스릴러#큐어#신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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