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자숙 모드’ 오래 끌 만큼 ‘신상’ 문제 여유 없어
尹 초반에 우왕좌왕했다간 李 등판 앞당겨질 수도
정용관 논설위원
지난 대선은 고대 원형경기장의 검투사 대결 비슷했다. 어느 쪽이든 한번 지면 살아나오기 힘든…. 어퍼컷과 발차기 퍼포먼스는 관중을 향한 눈요기 서비스였다. 참 험했고, 서로에게 치명적인 선거였다. 허나, 한국 대선은 그리 단순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패자에게 ‘0.73%포인트’의 숨통을 틔워놓은 것이다. 24만여 표로 승부가 판가름 날 것이라곤 솔직히 예상 못했다.
그날 새벽 패배가 확정된 뒤 민주당사에 나타난 이재명 전 경기지사의 모습은 의외로 차분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그는 “모든 책임은 오롯이 제게 있다”며 머리를 숙였다. 깔끔한 승복이었다. 그날 오후 선대위 해단식에서도 “모든 책임은 부족한 후보에게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알 듯 모를 듯한 대목이 추가됐다. “이재명이 부족한 0.7%포인트를 못 채워서 진 것이다.”
이 한마디에 패자 이재명의 불안한 심리가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진 것은 진 것이지만, 역대 두 번째로 많은 득표를 했으며, 자신은 “딱 0.7%포인트가 부족했던 후보였다”고 포장하려 한 다분히 의도된 발언일 것이란 얘기다. 대선 패배와 함께 자신에게 몰아칠 암울한 미래, 이를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지 등에 대한 정치적 복선도 깔려 있다고 본다.
선거에서 지면 100개도 넘는 이유들이 난무한다. 민주당 패배에 대한 진단은 더 복잡해 보인다. 문재인 정권에 대한 민심 이반이 더 큰 원인이었는지, 이 전 지사의 여러 흠결이 더 큰 원인이었는지 보기에 따라 다르다. 민주당에서도 “그 정도면 선전했다” “이재명이 아니었으면 이길 수도 있었다”로 의견이 갈린다. 이 전 지사가 내심 주목한 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대선이 끝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민주당 안팎에서 ‘이재명 조기 등판론’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현상이다. 더 눈여겨볼 부분은 이 전 지사의 움직임이다. 비대위원장을 맡아야 한다는 건의에 아무 말 없이 듣고 있기만 했다는 전언도 있었다. 낙선 사례 행보에도 슬슬 나서고 있다. 지방선거는 코앞에 닥쳤고 당의 리더십은 흔들리고 있다. 당장은 아니라도 정국 상황 전개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8월 전당대회 등 활로를 암중모색하는 듯한 분위기다.
왜 그럴까. 결국 그의 신상 문제, 즉 검경 수사 문제로 연결된다. 그는 대선 때 “제가 지면 없는 죄로 감옥 갈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의 숨은 심리가 은연중 드러난 대표적인 발언이다. 실제로 대장동 의혹, 부인 법인카드 유용 의혹, 옆집 합숙소 의혹 등은 이미 수사가 진행 중이다. 누가 억지로 중단시킬 수도 없다. 중앙 정치 무대에서 잊혀지는 순간 망망대해에 홀로 서게 된다. 172석 거대 정당의 우산 속에서 함께 움직이는 게 그에겐 절실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문재인의 적자(嫡子)인 김경수 전 경남지사가 사면을 받아 민주당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부상하는 시나리오도 상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현실화되면 그의 입지는 더 줄어든다. 과거 대선 낙선자들처럼 1, 2년 장기간 자숙 모드로 지내며 기회를 엿볼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다.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정치 활동에 나설 수도 있는 이유들이다.
이 전 지사에게 봄은 올 것인가. 아니면 혹한 겨울이 닥칠 것인가. 분명한 건 이 모든 게 윤석열 당선인이 어느 정도 국민 지지를 얻으며 국정을 잘 수행해 가느냐의 문제와 맞물려 돌아간다는 점이다. 0.7%포인트의 작은 숨통이 조금씩 열릴지, 영영 닫힐지 향후 몇 달이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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