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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나를 한국으로 이끌어준 이어령 선생님[이즈미 지하루 한국 블로그]

이즈미 지하루 일본 출신·서경대 글로벌비즈니스어학부 교수
입력 2022-03-11 03:00업데이트 2022-03-1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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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이즈미 지하루 일본 출신·서경대 글로벌비즈니스어학부 교수
“이어령 선생님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읽어본 사람? 아니면 이어령 선생님의 다른 책을 읽어본 학생 있나요?” 지난 월요일, 개강 후 일본문화 첫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물었더니 잠시 묘한 침묵이 흘렀다. 일본인 유학생 두 명을 포함한 18명의 학생들의 표정에서는 내 질문에 대해 아무런 공감을 읽어낼 수 없었다.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2월 26일 이어령 선생님의 별세 소식을 접한 나는 40년 전, 1982년에 일본에서 출판된 일본어로 쓴 그의 저서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읽었을 때의 충격이 떠올랐다. 그 책을 다시 읽고 싶어 집과 학교의 서가를 열심히 뒤졌지만 찾지 못했고, 서둘러 서점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종로의 대형서점 한 곳에 두 권 남아 있는 책을 찾아 얼른 구입했다.

이 책은 일본 가쿠세이샤(學生社)에서 발간되자 두 달 만에 10쇄까지 증쇄할 정도로 크게 화제가 됐다. 그리고 2007년에는 고단샤(講談社)에서 문고본으로 다시 출간돼 2021년 2월까지 21쇄를 찍어낸 스테디셀러로 수많은 ‘일본론’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이며, 이제는 고전이라 여겨진다.

1982년 당시 일본의 언론에서 쓴 기사의 제목들을 보면 ‘이어령의 화려한 등장’(일본경제신문), ‘서양에 치우친 문화론에 대한 반성’(아사히신문), ‘학문적으로 깊이 있는 일본인론’(선데이매일), ‘기존 일본인론의 범위를 초월할 만큼의 기폭력이 있다’(도쿄신문) 등 일본 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번에 다시 일본어로 읽어봐도 40년이라는 세월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울림이 컸다. 그러면서 처음 접했을 당시 느꼈던 감동이 새록새록 다시 되살아났다.

책은 일본 문화의 특징을 ‘축소(縮み)’를 키워드로 ‘밖에서 안으로 향한 방향성’으로 요약했다. 당시 인정받아 오던 일본론들, 예를 들어 ‘국화와 칼’ ‘아마에(甘え)의 구조’ ‘종적(縱的)인 사회’ 등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시작한다. 예를 들어 ‘아마에의 구조’에서 저자 도이 다케오(土居健郞)가 일본인의 특징으로 삼은 ‘아마에’라는 키워드가 한국에서도 ‘어리광’이나 ‘응석’ 등으로 자주, 다양하게 사용되는 개념인 것을 제시하며 일본만의 고유한 특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축소지향의 일본인’ 그 속에 펼쳐지는 일본론은 당시 결여됐던 아시아, 특히 이웃 한국의 시선에서 전개했다는 면에서 어느 일본론과도 차별되는 중요한 저술이었다. 당시 서구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눈에 씌웠던 비늘이 떨어지는(目から鱗が落ちる)’것처럼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아시아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더구나 번역서가 아닌, 외국인이 일본어로 썼다는 점도 놀라웠다. 일본인보다 더 풍부한 어휘력을 구사하며 유창하게 저술됐기에 책에 압도당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끝 무렵 여덟 살이었던 선생님이 직접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 그 당시 느꼈던 위화감에서 이 책이 출발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있었다. 시종 선생님의 박식하고 논리적인 전개에 설득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알게 된 또 하나는 책에 있는 많은 내용이 나 자신 속에 녹아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읽은 지 오래되었으나 어느새 책의 여러 부분들이 나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어쩌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한국에 관광하러 오기는 했겠지만 유학을 위해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1985년 내가 한국에 유학 가려고 했을 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왜 미국이 아니라 한국인가”라며 반대했다. 이런 반대들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이웃 나라 한국에서 일본에 대한 시각을 배우겠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이 아닌 이어령 선생님의 지성에 대한 믿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선생님 덕분에 선택한 길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최근 많은 일본 젊은이들이 한국의 음악이나 드라마에 관심을 갖고 한국어를 배운다. 또 일본에 관심을 갖는 한국 젊은이들도 여전히 많다. 40년 전에 한국의 석학이 쓴 이 명저를 지금도 양국 사람들이 더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나는 살아계셨던 선생님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나를 한국으로 이끌어 준 이어령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이즈미 지하루 일본 출신·서경대 글로벌비즈니스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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