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상훈]고조되는 유가상승 위기, 반짝 흑자 자랑할 때 아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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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국제부 차장
이상훈 국제부 차장
지구 반대편의 잔혹한 전쟁을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다름 아닌 주유소다. 우크라이나에서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고 있는 엄중한 현실에서 기름값이 오르는 이야기를 꺼내려니 전쟁 피해자들에게 미안하고 씁쓸하다. 그래도 전쟁과 무관할 것 같은 전 세계 평범한 시민들이 매일 겪는 현실이기에 조심스럽게 시작해 본다.

배럴당 110달러(3일 브렌트유 기준)를 돌파한 국제유가 상승세는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기록했던 역사상 최고가인 배럴당 147달러 돌파를 코앞에 두고 있다. 서울 평균 휘발유값은 4일 L당 1851원으로 이달 내에 2000원대로 올라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민심에 민감한 선거철만 아니었다면 정부가 기름 절약을 위해 승용차 n부제를 부활시켜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국제유가 상승 여파로 올 들어 세계 각국 물가 상황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게 높은 수준이다. 1월에 전년 동월 대비 7.5%라는 경이적 상승률을 나타낸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더 오를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인플레이션의 뇌관인 유가 상황은 앞으로가 더 심각하다. “배럴당 200달러까지 오를 것”이라는 미국 투자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전망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게 현실이다. 이쯤 되면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글로벌 초(超)인플레이션이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유가 상승으로 촉발되는 인플레이션은 ‘오일쇼크’라는 깊은 흉터를 남긴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 시절 정치적 사안이 아닌 이유로 발동한 유일한 긴급조치가 1차 오일쇼크 대책인 1974년 긴급조치 3호다. 1973년 3.2%이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불과 1년 만에 24.3%까지 폭등했다. 이 정도 물가 상승이면 ‘서민 지갑을 약탈해 가는 수준’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글로벌 경제가 이렇게 요동치는 상황이지만 최근 정부 반응을 보면 과연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문재인 대통령은 2월 무역수지가 3개월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는 발표가 나오자 “매우 긍정적이다. 매우 좋은 흐름”이라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메시지를 내놨고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한국 제조업 저력을 보여준 쾌거”라고 말했다. 에너지 수입 가격이 높아지면 국내 물가에 큰 부담을 주고 1개월 무역흑자액 정도는 금세 녹여 버릴 수 있는데도 최악의 국면에 대비하려는 정부의 자세는 찾아보기 어렵다.

‘경제는 심리’이니 일부러라도 긍정적 메시지를 내놓는 것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가 전쟁 소용돌이에 놓인 현 시점에 월간 통계 한두 개를 놓고 이런 평가를 내리는 건 현 경제 상황에 대한 냉철한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빚어진 이번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70여 년간의 국제 안보질서를 뒤엎는 것만큼이나 세계 경제질서를 위협하는 사건이다. 한국 경제에 어떤 상처를 입힐지 가늠하기조차 쉽지 않은 엄중한 때다. 단기 지표에 일희일비하는 자세는 국민을 불안하게 할 수 있다.

이상훈 국제부 차장 sanghun@donga.com


#유가상승#우크라이나#기름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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