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설임’, 나와 세상을 넓게 볼 기회[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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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망설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큰일, 작은 일 가리지 않고 늘 망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일들은 척척 결정하면서도 늘 그 일만은 망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망설임은 “이리저리 생각만 하고 태도를 결정하지 못함”입니다.

‘망설임’에 가장 가까운 정신분석 용어는 ‘양가감정(兩價感情)’입니다. 같은 사람, 상황, 물건, 과제, 목표, 생각 등에 대해 동시에 서로 어긋나는 감정을 지닌 상태를 말합니다. 동일 대상에게 사랑과 미움, 경쟁심과 협동심, 같이 있고 싶은 마음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공존한다면 양가감정입니다. 양가감정은 사람을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긴장하게, 갈등에 빠지게 합니다. 갈등에 빠지면 어떻게 정리할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입니다. 기존의 정신분석은 양가감정을 해석해서 정리할 대상으로 삼았지만, 현대정신분석은 이를 피분석자나 분석가 모두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회이자 방법으로 활용합니다. 조직 심리학 등에서도 조직과 세상을 파악하고 전략을 세우는 데 양가감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양가감정은 매우 불편한 감정입니다. 서로 다른 두 가지가 마음에서 대립하고 충돌하니 마음은 불쾌하고 몸은 긴장합니다. 혈압이 올라갑니다. 당연히 양가감정을 느끼면 외면하거나 제거하려 합니다. 물론 부정적인 면이 있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긍정적인 힘을 찾으려는 노력도 해야 합니다. 망설임의 형태로 나타나는 양가감정은 내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나와 세상을 더 넓게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질문을 던지고 충실한 답을 구한다면 망설임과 양가감정은 부담이 아닌 혜택입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러 가치가 뒤섞인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생물학적으로도 모든 인간은 양성성(兩性性)을 지니고 있습니다. 남성성이 우세하면 남성이고, 여성성이 우세하면 여성일 뿐입니다. 사회 전체로 눈을 돌려도 그러합니다. 보수와 진보, 안정과 혁신, 성장과 복지, 전쟁과 평화 모두 혼재하는 가치여서 특정 가치를 일방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듯이 주장하는 자체가 본질적인 모순입니다. 자신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는 일입니다. 서로 어긋나는 표상이 내 마음에, 내 조직에 공존한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본인도, 세상도 편합니다.

양가감정이 지닌 이중성에 주목하고 활용한다면 현명하고 창의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사람이 사는 세상에 적응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통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존재입니다. 적응과 창의는 늘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하는 양가감정의 결과로 생깁니다. 그러니 양가감정을 부정적인 것만이 아닌, 긍정적이고 유익한 힘으로도 이용해야 합니다.

양가감정을 버리려고 하지 말고 일단 받아들여 경험한다면 내 마음과 세상이 열립니다. 넓게 보고, 다양하게 인식하며, 잘못 알고 있던 것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생각이 유연해져서 넓고 깊게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생의 쓴맛 단맛 다 본 사람이 인생을 더 넓게 보는 것처럼, 양가감정 상태에서 생각의 공간이 확장되면 문제를 더 잘 파악하게 됩니다.

망설임도, 양가감정도 비이성적인 힘이어서 다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망설이기만 한다는 말은 양가감정을 제때,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망설이게 하는 큰 힘은 분노, 증오와 같은 부정적 감정입니다. 그런 감정에 사로잡히면 정보처리 능력이 굳어져서 판단 착오를 일으킵니다.

인지적 경직성에 따른 판단 착오는 흔히 협상에서 일어납니다. 타결과 결렬이라는 흑백논리에 빠져서 벗어나지 못하면 협상은 결렬되기 쉽습니다. 결렬 가능성은 협상 내역이 아닌, 당사자의 태도, 감정 표현, 행동에서 예측이 가능합니다. 그 모든 것에 양가감정이 관여해서 알게 모르게 힘을 발휘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협상 당사자가 유연성을 버리고 확고부동함을 선택하도록 몰아갑니다. 관계를 맺지 않고 끊도록 유혹합니다. 협상 중재자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당사자가 유연성의 축을 유지하면서 마음과 판단의 균형을 잡도록 도와야 하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결단력이 없는 사람은 망설이는 사람입니다. 지나친 망설임은 행동 마비로 이어져 결정을 미루다가 낭패를 봅니다. 생각은 지나치게 많이 하면서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망설임은 갈등에서 해결로 가는 중간 단계일 뿐인데 망설임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흔합니다. 망설임 자체가 목표가 아닌데도 말입니다. 망설임은 기다림과 결정 간의 선택을 위해 태어나 존재할 뿐입니다.

망설이는 이유는 선택이 괴롭기 때문입니다. 선택에 대한 확신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선택할 필요가 없으면 괴롭지 않습니다. 협상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선택할 필요가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입니다.

망설이다가 낭패를 보는 사람을 보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진실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아마 당사자조차도 잘 모를 가능성이 큽니다. 의식이 아닌 무의식의 힘이, 이성이 아닌 감성의 힘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간에는 해설이 넘치지만 정답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망설임#나와 세상#넓게 볼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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